2019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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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수 대주교의 발자취

맑은 미소 따뜻한 마음, 영원히 기억되리…. 사형제도·모자보건법 폐지 등 생명 수호에 앞장. 교구 쇄신·복음화에 헌신 … 100주년 기틀 마련. 김수환 추기경 이어 17대 본지 사장신부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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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6월 대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주례한 최영수 대주교가 레지오 단원들을 축복하고 있다.
 

대구대교구 제9대 교구장 최영수 대주교가 8월 31일 오전 6시 20분 지병으로 대구가톨릭대학병원에서 선종했다. 최 대주교는 선종 직전까지도 “교구 100주년과 교구발전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며 끊임없이 교구를 위해 기도했다.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 준비의 초석을 다진 주역이었으며, 새로운 100주년을 여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던 최영수 대주교. 무엇보다 아랫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맑고 따뜻한 성품으로 교구민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참 목자’였기에 그의 선종 소식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

최영수 대주교는 타인을 잘 배려하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1991~95년 경주 성동본당 주임 시절 ‘흰머리 소년’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부드러운 미소와 애정 어린 사목 활동으로 신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최 대주교. 그의 성품은 훌륭한 신앙적 유산을 물려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1942년 3월 23일 경북 경산에서 부친 최석암(비오), 모친 김정식(막시마) 사이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최 대주교는 신심 두터운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해맑은 심성을 품고 자랐다. 특히 주변 사람들을 보살피고 베푸는 것을 긍지로 삼았으며, 늘 겸손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 동창 최재용 신부(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도 2001년 최 대주교가 보좌주교로 임명되던 당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남을 헤아릴 줄 아는 고운 성품을 지녀 동창들이 잘 따랐다”며, “후에 사목자로서 큰 몫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외유내강형 사목자

최영수 대주교가 1982~86년 산격본당 주임시절 성당 건립을 위해 혼신을 쏟다 몇 번이나 연탄가스에 중독되고, 밥 대신 라면만 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경주 성동본당 주임시절에는 공소를 짓기 위해 계획한 예산의 3배를 건립비로 지원해 지금의 양남성당을 세울 수 있었다고. 1972~76년 영천본당 주임시절에는 본당에서 신앙학교를 처음 도입할 정도로 청소년 교육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처럼 최 대주교는 언제나 신자들의 편에 서서 인자한 모습으로 감싸는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반면 온화한 성품과 달리 업무에 있어서만큼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매사에 신중하게 일을 처리했다. 최 대주교는 사제 서품 후 본당과 특수사목 등 다양한 소임을 맡으며 어떤 일이든 열정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무난히 일을 처리해 ‘외유내강형 사목자’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1995~97년 제17대 가톨릭신문 사장을 역임했으며, 1996~2001년 대구 평화방송 초대 사장으로 개국을 주도하는 등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사명에도 최선을 다했다.

생명수호에도 앞장

2000년 12월 22일 보좌주교 임명 후 최영수 대주교는 2001~2004년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대사회적으로 생명문화 정착과 인간존엄성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무엇보다 최 대주교는 사형폐지 운동과 반생명법인 모자보건법 폐지운동 등에 발 벗고 나섰다. 최 대주교는 타 종단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폐지에 대한 종교인들의 뜻을 모으는 데 구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2001년 6월 국회회관 내 대회의실에서 최초로 6대 종단이 연합해 사형폐지 행사를 가지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새만금 갯벌 살리기 등 환경운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최 대주교는 당시 주교회의 차원에서 처음으로 새만금 간척사업과 관련해 공식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00주년 사업 기틀 마련

보좌주교 임명 후 최영수 대주교는 5년 여 동안 이문희 대주교를 보필하며 총대리직을 수행, 1997~99년 열린 1차 교구 시노드를 통해 마련된 후속사업인 대리구체제 정착과 소공동체 운동 활성화 등에 매진하며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 준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구설정 100주년 준비사업은 최 대주교가 2007년 4월 30일 교구장에 착좌하면서 더욱 가시화됐다. 같은 해 10월 23일 교구 사제연수를 통해 최 대주교는 ‘다시 새롭게 2011’(Renew 2011)을 표어로 내건 가운데 ▲2차 교구 시노드 ▲100주년 기념 대성전 건립 ▲100주년사 편찬 등 100주년 3대 기념사업을 공표했다.

지난 100년 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한편, 앞으로의 100년을 전망하면서 ‘다시 새롭게’ 교구 전체에 복음정신을 불러일으키는 3가지 기념사업을 공표한 최 대주교는 교구 쇄신과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교구의 모든 역량을 100주년 기념사업에 쏟을 것을 당부했다.

최 대주교는 기념사업 공표의 자리에서 “교구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회의를 통해 모든 사제단의 의견을 수렴할 것”이라며, “앞으로 다가올 100주년을 향해 우리는 이제 앞만 보고 달려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교구 발전을 위해 온 열정을 쏟아오던 최영수 대주교는 뜻밖의 중병으로 8월 17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수락으로 교구장직을 사임했고, 31일 하느님나라로의 영원한 여정을 떠났다.

주님 뜻에 순명한 ‘충실한 목자’

최영수 대주교는 모든 사제, 수도자, 평신도, 또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전 교구민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아버지’였으며, 늘 신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친구’였다.

또한 사목표어 ‘그리스도와 함께’(1코린 1,5)처럼 최 대주교는 늘 주님과 함께 판단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한 교구장이었다. 이는 복음 말씀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포콜라레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 대주교는 주교이자 사제이기 이전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일치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병마와 싸우는 가운데서도 늘 교구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늘 기도했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순명한 ‘충실한 목자’였다.

언제나 교구민들과의 일치를 이루며 교구의 쇄신과 복음화를 위해 봉사할 것을 다짐해 왔던 참 목자를 우리는 잃게 됐다. 이제 최 대주교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에 기대어 ‘그리스도와 함께’ 100주년을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할 우리의 몫이 남았다.

최영수 대주교 약력

▲1942년 3월 23일 경북 하양 출생 ▲1960년 3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70년 7월 가톨릭대학교 졸업 ▲1970년 11월 6일 사제서품 ▲1970년 11



가톨릭신문  2009-09-0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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