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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없다고 교황이 말했다고?

이탈리아 은퇴 언론인 말에 바티칸이 반박 … 교황, 지옥을 ‘하느님과의 단절’이라 수차례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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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읽고 그린 깔대기 모양의 ‘지옥도’.



“교황이 지옥은 없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은퇴 언론인 에우제니오 스칼파리(93)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고 나와 교황이 지옥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말하자 로마의 호사가들이 바빠졌다. 주님 부활 대축일 무렵 주요 외신과 소셜 미디어를 타고 그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바티칸은 “그 얘기는 스칼파리 자신이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라고 반박 성명까지 냈다.

그는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의 공동 창립자다. 몇 년 전에도 교황 발언을 자기 입맛에 맞게 재구성해 옮겨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사악한 영혼은 죽으면 어디로 가고, 어떤 벌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교황이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고 소멸한다.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지은 영혼은 그저 소멸될 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 교황의 발언은 차고 넘친다. 교황은 범죄 집단 마피아 조직원들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지옥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당신들에게 지옥을 면할 시간이 남아 있다.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 길로 가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뿐이다.”(2014년)

3년 전 한 스카우트 소녀 대원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용서하시는데, 지옥은 왜 있는 건가요”라고 교황에게 물었다. 교황은 “훌륭하고 까다로운 질문”이라면서 소녀의 눈높이를 맞춰 대답했다.

“하느님을 질투하는 교만한 천사가 있었어요. 하느님의 자리를 원했죠.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 천사를 용서해 주시려고 했는데, 천사가 ‘됐어요. 용서 같은 건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어요. 그게 지옥입니다. 하느님이 지옥에 보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2016년 강론에서는 “지옥은 ‘고문실’이 아니다”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 단절되는 끔찍한 상태가 지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교황의 이런 설명은 현대 신학이 정의하는 지옥의 개념과 일치한다.

“지옥은 하느님과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음으로써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자유로이 선택한 것이다.”(「가톨릭대사전」 ‘지옥’ 편)

지옥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상태)이라는 교황 설명은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도 나와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 자유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죽을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미사 전례와 일상 기도를 통해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2베드 3,9)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빈다.”(1037항)

과거와 달리 현대 신학은 우주 공간 어디엔가 있을지 모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 또는 국내에서 인기를 끈 판타지 영화 ‘신과 함께’에 나오는 ‘고문실’ 같은 지옥을 언급하는 신학자는 없다.

하지만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형벌을 받는 공간적 표상으로서의 지옥이 등장한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편에서 탐욕스러운 부자가 저승에서 고초를 겪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마태 3,12),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 8,48) 등의 구절에서도 그런 표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은 구약시대부터 이어진 당대의 언어 습관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신학자들의 해석이다. 올바른 행위를 촉구하는 보다 강력한 충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종교들은 악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해답을 저승 세계(지옥)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지옥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된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문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나가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 이를 이해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그리스도의 외침이 더 크게 들려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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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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