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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비움과 버림

김소일 세바스티아노(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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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책이 가득한 서재를 꿈꿨다. 아쉽게도 한 번도 이뤄보지 못했다. 열 번 넘게 이사를 다니면서도 서재 한 칸 마련이 어려웠다. 지금도 책장은 거실 한쪽을 겨우 비집고 서 있다. 내심 이렇게 둘러댄다. 책을 어찌 골방으로 쫓으랴. 당당히 거실로 모셔야지. 가당찮은 변명이다. 누가 봐도 거실의 주인은 따로 있다. 누군가 TV를 켜면 그 현란한 빛과 소리가 공간을 지배한다. 책장은 복도에서 벌서는 아이처럼 쭈뼛거리다 폭군이 잠든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든다.

설 연휴를 보내며 책을 버렸다. 둘 곳 없는 책이 늘어나면서 집안이 너무 어지러웠다. 책상과 탁자, 침대와 화장실에 널브러진 책들이 자리를 찾아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해결책은 하나, 솎아내기였다.

책은 단순한 지식의 보고가 아니다. 무슨 지혜의 샘이라 말할 자신도 없다. 버릴 책을 고르다 보니 책은 추억이었다. 한 시절의 치기 어린 열정을 간직한 책들이 저마다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한다. 설마 날 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커피가 묻어난 책갈피가 속삭였다. 그해 여름 해변의 찻집이 생각나지 않니. 그 기억마저 지워버릴 거야? 밑줄을 긋고 느낌을 적어둔 행간이 놀라 소리친다. 잘 생각해 봐. 네 그 알량한 지식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그저 몇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책 정리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저마다 생존의 이유를 내세우는 책들 앞에서 재판은 한없이 늘어졌다. 긴 항소이유서를 읽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재판은 독서가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엄격한 살생부의 기준을 세웠다. 다시 읽을 가능성이 없는 책은 과감히 버린다. 젊은 날의 추억과 열정과 은덕은 무시한다. 오직 활용할 책만 남긴다.

그렇게 구정 대학살을 끝냈다. 책장 세 칸을 채우니 한 뼘쯤 여유 공간이 생겼다. 살아남은 책들을 바라보니 재판은 절대 공정하지 않았다. 숨겨진 또 다른 기준이 슬며시 힘을 발휘했다. 내 빈약한 지식을 가려보려는 위장이었다. 이 정도 책은 읽었노라고 과시하고 싶은 허영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향한 변명과 위로 같기도 했다. 책장에 남겨진 것은 책이 아니라 거짓과 욕심이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 욕망과 집착의 크기였다.

돌아보니 책만이 아니다. 집안 곳곳에 물건이 뒹군다. 버리긴 아깝고 쓰기엔 마땅찮다. 언제 다시 입을까 싶은 옷들이 있다. 몇 년 동안 꺼내보지 않은 그릇도 보인다. 포장만 뜯어본 선물, 수십 년 된 담금주는 준 사람조차 가물거린다. 진즉 누군가에게 줬어야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지 못한 물건은 가치를 잃고 잡동사니로 전락했다. 결코 근검절약이 아니다. 내 우둔과 아집의 증표일 뿐이다.

공간은 비울수록 커진다. 버릴수록 여백이 살아난다. 물건은 공간을 잠식하다가 차츰 합세해 인간의 정신을 침범한다. 물욕에 물든 영혼은 그 무게 때문에 천국으로 날아오르지 못한다.

집착은 허약한 영혼의 속성이다. 탐욕은 정신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마음에 보화를 쌓지 못한 사람이 재물에 집착한다. 내세울 게 없을수록 과시하려 한다. 이젠 좀 벗어나고 싶다.

퇴장의 시간이 머지않았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물러난다. 주역이나 현역의 자리는 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비움과 버림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하나씩 버릴 테다. 더는 모으지 않으련다. 삶의 마지막 시기엔 책상 위에 성경 한 권만 있는 텅 빈 방에서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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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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