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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죽음에 바치는 헌사

김소일 세바스티아노(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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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일 세바스티아노(보도위원)



우리는 죽음 앞에 경건하다. 웬만해서는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들 삶에 얼룩이 없겠는가? 죽음 앞에서는 더는 거론하지 않는다. 한평생 짊어졌을 삶의 무게를 헤아리며 삼가 고개를 숙인다. 고단했던 한 생애를 내려놓고 저승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한다.

죽음을 이르는 용어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기리고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신중하게 가려 썼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닌 죽음의 표현들이 여럿 생겼다. 언뜻 꼽아도 수십 가지다. 사망, 서거, 사거, 타계, 별세, 작고, 운명, 영면, 승천, 귀천, 붕어, 승하, 입적, 열반, 입멸, 소천, 선종 등이 있다. 순우리말로는 ‘죽다’ ‘숨지다’ ‘돌아가시다’가 있다. 관용적 표현으로는 ‘숨을 거두다’ ‘세상을 뜨다’ ‘생을 마감하다’ ‘유명을 달리하다’ ‘영원히 잠들다’ ‘하늘나라로 가다’ 등이 쓰인다.

저 많은 말이 다 죽음에 바치는 조의와 더불어 그 삶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다. 죽음은 삶의 끝맺음이니 그 예우와 격도 삶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의 용례를 찾아보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거했고, 강영훈 전 총리는 별세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타계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사망했다. 작가 박완서와 화가 천경자는 별세로 표현됐다.

죽음을 대하는 마음은 아무래도 사후세계를 믿는 종교에서 각별하다. 불교는 입적과 열반을 주로 쓴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의 음역이고, 번뇌에서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입적은 고요함에 들었다는 뜻이니 역시 같은 말이다. 개신교는 소천(召天)으로 표현한다. ‘부름을 받고 하느님께로 갔다’는 뜻이니 참 좋은 말이다. 가톨릭에서 쓰는 선종은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니 죽음에 바치는 최고의 헌사다. 다만 죽음 이후의 내세관을 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한편에서는 죽음을 이처럼 등급화하는데 거부감을 보인다. 최근 한 매체는 어느 주교의 선종을 보도하면서 선종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뜻은 좋지만 대상에 따라 선택적으로 쓰이는 차별적 용어라는 것이다. 그 매체가 선택한 단어는 ‘숨졌다’였다. 어쨌든 주교와 평신도의 죽음에 특별히 다른 용어를 쓰지 않겠다는 문제의식은 존중할 만하다. 다만 ‘선종’에 깃든 기도의 마음마저 버린 것 같아 아쉽다. 차별이 문제라면 똑같이 ‘선종’을 쓰면 된다.

정작 어려운 것은 그게 아니다. 도저히 복된 죽음이 아닌 경우의 용어 선택이다.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거나 뚜렷한 악덕이 알려진 경우에도 선종이란 말을 쓸 수 있을까? 그 모든 상찬과 심판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저 기리는 마음으로 선종이라고 해야 할까? 언론 매체의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평화신문을 찾아보니 평신도의 죽음에 선종과 별세를 혼용하고 있다. 특별한 기준이라기보다는 기자의 어휘 선택으로 보인다. 별세는 세상과의 이별이니 종교적 의미는 거의 없다. 차라리 선종을 쓸 수 없는 경우엔 ‘귀천’이 적절해 보인다. 귀천은 ‘하느님께 돌아가다’ 또는 ‘하늘나라로 돌아가다’로 해석할 수 있으니 가톨릭 신앙과도 잘 어울린다.

삶도 그렇지만 특히 죽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께로 가는 모든 이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춘 용어를 써야 한다. 죽음 앞에 숙연한 마음은 삶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문제다. 불행과 허물을 덮어주고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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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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