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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3·1 운동 100주년과 교회(표정훈, 요한사도,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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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역사적인 3ㆍ1 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이를 기념하고 의미를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를 펼치게 될 것이다. 1919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 신자 수는 8만 8523명이었다. 교회의 정교(政敎) 분리 방침에 따라 독립운동이나 만세운동에 신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드물었지만 그럼에도 조명해볼 만한 인물과 사건들이 있다.

1919년 3월 5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고,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도 3월 23일 만세 대열에 참가했다.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조기 방학에 들어갔고,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퇴학당했다. 강화나 경기 광주 등지에서는 천주교인들이 만세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타 종교에 비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3ㆍ1 운동 당시 천주교 신자 53명이 체포됐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전과 병합 즈음에도 자주독립을 위해 활동한 신자들이 있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회는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1910년 말 발각되어 많은 이들이 체포당한 안악사건(安岳事件)은 신자 안명근(야고보)이 주도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서도 의주본당에서 활동한 이기당(안토니오)이 있었다. 안명근의 사촌 형이기도 한 안중근(토마스)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3ㆍ1 운동 이후에도 황해도 은율본당의 윤예원(토마스) 신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조직에 가담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자금을 모았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곽연성(요셉)이 천주교 대표로 파견됐다. 1919년 간도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의민단(義民團)이 있었다. 국내 진공작전을 목표로 약 300명 대원이 무장했다. 신자들이 모은 군자금이 바탕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연락하였고 1920년에는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1924년 경기 용인 앞고지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안학만(루카) 신부는 우리 역사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고 성무 집행정지 처분을 받은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성무 집행정지 처분 해제 뒤 귀국하여 서울 주교관, 서흥본당, 장연본당, 해주본당 등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944년 56세로 선종했다.

3ㆍ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서 신자들이 펼친 활동은 크게 조명받지 못해온 것이 현실이다. 조명하더라도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교회는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 차원에만 머물지 않으며 그러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독립운동은 불의(不義)한 침탈과 지배에 항거하는 정의의 실천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보편적 가치를 위해 헌신, 희생한 분들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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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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