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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 주간]가톨릭·정교회·성공회 평신도에게 듣다, 일치 운동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형제교회 평신도들끼리 만남과 대화로 간극 좁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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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수도교회에서 ‘떼제기도와 함께하는 하루 피정’에 참석해 함께 떼제성가를 부르며 기도하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 젊은이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는 삼위일체’(「일치교령」 3항) 신비는 그리스도인이 왜 일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1968년부터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을 지내왔지만 일치의 길은 여전히 요원하다. 특히 ‘아래에서의 일치’는 아직 기대하기가 어렵다. ‘교회 분열’이라는 부끄러운 현실을 자각할 뿐이다. 주교회의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 위원회 한미숙(코린, 포콜라레 한국지부 종교 간 대화 담당) 위원과 한국 정교회 출판사에서 번역을 맡고 있는 박노양(그레고리우스)씨, 월간 「종교와 평화」 이계우(안드레, 대한성공회) 편집장 등을 만나 ‘아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들었다.

 
 

 
 
한미숙 위원은 우선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일치에 이르는 길로 ‘대화’를 꼽았다. 일치 기도회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다 돼 가는데도 교회 공동체 전반에 교회 일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건 대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에서다. 나아가 일회성 행사를 지양하고 가톨릭 교회와 갈라진 형제들 간 ‘공유의 장’을 꾸준히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계우 편집장도 “평신도 차원의 일치 운동이 확산되려면 무엇보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현실 문제나 사회 현안에 함께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갈라진 형제들 간에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먼저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교회가 같은 성경을 갖고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고 그다음에 구체적인 사랑의 만남과 대화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신학적 논쟁’보다는 평신도들 간 풀뿌리 차원의 만남과 교류를 선행하고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이뤄나가야 한다는 주문도 제기됐다.

그러나 신앙적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 일치 운동의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기에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교리적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박노양씨는 “신앙의 일치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적어도 일치의 차원에서 신앙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며 “교리가 우리 신앙의 표현이라고 볼 때 가장 궁극적인 일치는 신학적, 신앙적 일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치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뭘까. 한미숙 위원은 근거 없는 ‘선입견’과 뿌리 깊은 ‘적대감’을 꼽았다. 천주교회는 마리아 교회라는 편견, 개신교는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데서 일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한 위원은 “몇 해 전에 로마에서 포콜라레의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평의회 관계자들과 한국 여성신학자들 간 만남이 성사된 적이 있는데, 그 모임에 다녀온 한 개신교 여성 신학자가 ‘내가 알던 가톨릭 교회가 아니었다. 평신도 중심의 복음 생활이 살아 있었다. 너무나도 새롭고, 너무나도 놀라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며 “결국은 만남이 이들 여성 신학자들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전했다.

이 편집장은 반면 ‘기복적 경향’이 팽배한 한국 신자들의 절름발이 신앙생활을 꼽았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 강조하는 이웃과의 사랑이나 나눔보다는 나와 주위 사람들 복을 비는 데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회들과 해마다 한두 차례씩 ‘교환 예배’를 하면서 교류하고 있다”고 전하고 “일치를 이루려면 다른 교파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을 버리고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용어 차이 문제도 나왔다. 서로 쓰는 단어가 다르거나 부정적 의미를 담은 말에서부터 막히면서 일치운동이 답보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일례로 ‘갈라진 형제들’이라는 표현도 되도록 ‘타 교파 형제들’ 혹은 ‘다른 그리스도교회 형제들’이라고 쓰는 것도 형제들의 반감을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아래에서의 일치’는 그리스도인은 한 형제라는 인식을 갖는 데서 출발해 서로 만나고 대화하며 사회를 향한 봉사에 협력하고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대화와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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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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