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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81) 8가지 참 행복 - 박해영성의 재즈와 클래식

사랑은 인내한다 돌파한다 마침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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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들이 반대한 시성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할 124위 시복식! 잠깐 치러질 예정이지만 한국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이 침묵의 세월을 종식하고 세세 대대에 빛날 신앙의 표양으로 데뷔하는 역사적인 시간이 될 것이다. 물론 하늘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는 땅에서의 명예회복 축제다.

이번 시복식 뒤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많다. 시작은 103위 순교 성인의 시성이 후대 순교자들 위주로 추진되어 선대 순교자들에 대해 ‘불효’의 누를 범한 격이라는 자성이었다. 이에 후손들과 연구가, 학자, 관계자들이 오랜 기간 합심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성과가 124위 시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복자들이 증거한 신앙의 면면을 열렬히 공경하고 따르는 한편, 그들을 빛나게 해 준 숨은 공로자들에게도 길이 심심한 감사의 념을 품어야 할 것이다.

103위 성인에 이어 124위 복자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우리 한국천주교회! 그들을 현양하는 것은 의무이기 이전에 특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오늘날 어떻게 순교영성을 살아내야 할까. 고맙게도 우리는 그 답을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서 발견한다.

교황청에서 소화 데레사를 시성하려 하자 동료 수녀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고 한다.

“소화 데레사는 별 업적도 없는데 왜 시성하려고 합니까?”

이에 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답변은 오늘 우리를 향한 매력적인 초대다.

“성녀는 지극히 작고 평범해 보이는 일에도 큰 사랑을 담아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소화 데레사를 시성한 이유입니다.”

그 사랑의 동기에서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님 앞으로 가져와 봉헌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아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동료 수녀들에게는 너무도 평범해 보였기에 ‘성인’의 조건과는 무관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 시성 관계자는 소화 데레사 영성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알았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기도하지도 선을 행하지도 못할 때, 그런 때는 작은 일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 작은 일들은 이 세상의 위대한 것보다, 극심한 순교의 고통보다 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성녀는 그 수줍어하는 미소로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박해영성의 재즈라 할까.

■ 사도 바오로의 박해영성

소화 데레사 성녀는 순교의 중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이렇게 작은 순교, 일상의 순교를 위한 지혜를 배웠으니, 차제에 박해영성의 클래식을 익혀 보기로 하자.

자칫하면 ‘박해’의 영성을 잘못 알아들을 수 있다. 의미 없는 핍박이나 본인의 탓에 의한 비난을 ‘박해’로 포장할 우려가 있다는 말이다. ‘박해’라는 말을 붙이려면 적어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의로움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치르는 고충을 박해의 전형으로 본다. 그 대표는 단연 사도 바오로다.

열정의 전도여행을 달렸던 ‘사도 바오로’. 그는 그 내적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23).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오로는 ‘이 모든 일’을 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한다.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 성구를 거울삼아 자문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복음을 위하여’ 하는 것 맞지?” 이렇게 물으면 그 자체에서 측량할 수 없는 힘과 위로가 충전되곤 한다.

저런 확신만 있다면 어떤 박해도 감당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

바오로 사도는 말 그대로 아예 목숨을 내놓고 복음 전도 여정을 밟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힘 덕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박해를 견디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 내가 꼽은 명대사

내가 꼽는 영화 속 명대사가 있다. 바로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한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한 문장. 러시아에 사는 유다인들의 고통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테빗의 아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테빗에게 갖가지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테빗이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Do you love me?”(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그러나 아내는 그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또다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자신이 25년 동안 아이를 낳으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는 둥 그간 고생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죽 늘어놓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테빗이 다시 한 번 말한다.

“I know that, But do you love me?”(그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이 이야기를 우리는 반어법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내의 끊임없는 불평에 동문서답으로 응하는 것같이 보이는 테빗의 말 속에는 그의 속 깊은 사랑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당신이 힘든 것 이상으로 나도 힘들다구! 요즘 세상 살기가 얼마나 각박한 줄 알아? 더구나 러시아에서 유배자처럼 살아야 하는 내 처지가 얼마나 고달픈 줄 알아? 당신이 쏟아내는 불평보다 나는 더 많은 불평 갖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결코 그 불평을 당신 앞에 늘어놓지 않아. 왜인 줄 알아? 사랑하기 때문이야.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구. 그래서 묻는 거야. 당신 정말 날 사랑해?”

결국 이건 치유의 말이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불행은 얼마든지 행복으로 승화된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어떤 모진 고난 앞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어떤 위기에 직면해서도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다. 사랑은 인내한다. 사랑은 돌파한다. 마침내 사랑은 승리한다.



차동엽



가톨릭신문  201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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