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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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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있는 법정

틈나는 대로 고아 찾아 돌보며 소년심판소 근무 자원

단죄보다는 사랑 베푸는 법관으로 소년 교화에 힘써

법복 벗고 고아들과 살려고 결심했으나 간암 말기 판정

1948년 어느 봄날 김홍섭은 녹색 기운이 완연한 우이동 계곡에 올랐다. 그곳에 있는 고아원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홍섭은 틈나는 대로 고아원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 위로해 주곤 하였다. 고아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던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가리켜 사람 사이에 피는 인정의 꽃(人情花)으로 표현했다. 고아들을 만나고 돌아올 적마다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 산에서 나무하는 아이를 돕고 있는 김홍섭.

이때 그는 자신이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나섰으면 하는 염원을 가져보았지만 대법원장의 권유를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아직 뚝섬 농사꾼으로 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사람이 사람을 단죄해야 하는 재판 그것에 대한 회의 때문에 복직은 여간 망설여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김홍섭은 결국 법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대신 김홍섭은 소년심판소(소년부 지원) 근무를 자원했다. 당시 소년부 일은 법원 내에서 인기가 없는 부서였다. 소년범 재판이나 하는 판사는 힘없는 판사라고 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홍섭은 생각이 달랐다. 신생 대한민국에서 제일 시급한 문제가 아이들을 곧게 길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밀려나 법의 지붕 아래 들어온 소년범들은 보호하고 돌봐야 하는 존재였다. 그는 미성년자인 아이들을 성인 범죄자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았다. 소년범 교화는 교육의 일환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게 김홍섭의 소신이었다.

사실 검사 시절부터 그는 소년범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죄를 짓고 잡혀온 소년들을 심문할 때마다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죄지은 아이들의 형편을 헤아리다 보면 언제나 벌을 주는 쪽보다 훈계하여 내보내는 쪽이 되곤 했다. 그런 김홍섭을 두고 선배 검사는 ‘변호사 겸임의 검사’라며 핀잔했다. 이제 소년부 지원장이 된 김홍섭은 소년 교화를 통해 법의 미래 가치를 실현해 보겠다는 결심을 품었다.

소년범 재판에서 김홍섭은 판사라기보다는 친부모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나무라거나 호통치지 않고 타이르는 법관이었다. 부득이 소년원으로 보내야 할 때라도 몹시 주저하며 가위탁을 받아 줄 사람이나 사회단체를 물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 김홍섭은 ‘꽃 있는 법정’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이 꽃을 어이 버리랴 /…꺾이운 꽃 짓밟혔기로니 / 이 꽃을 차마 버리랴 / 버릴 바 없어 실에 엮어 벽에 꽂아두노라면 / 양춘 삼월 혹연 재생도 하리.’

그의 눈에는 법정에 선 아이들이 모두 소중한 꽃봉오리였다. 모진 바람을 맞아 잠시 스러졌지만 이내 싱싱한 망울을 피워 올릴 꽃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이니 다시 일으켜 세워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게 어른의 책임이라고 김홍섭은 믿었다.

그는 소년 교화에 대해 사회 전체의 관심을 촉구하는 데도 앞장섰다. 1950년 1월 한 일간신문에 사흘간 연속으로 ‘소년 교화’에 관한 그의 글이 실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년 범죄에 대한 형벌이나 규칙은 성인 범죄와 크게 구별이 없어서 이를 시정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

김홍섭은 소년 범죄 대책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키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또 ‘17세기 로마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감화 감옥을 설치하여 범죄 소년에게 적당한 교훈과 직업을 수여함으로써 가정에 유익한 인재가 되도록 하라는 지시가 서구 사회의 소년 사법 보호의 지도 정신이 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김홍섭은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가톨릭 정신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국내 소년 보호 시설이 미비한 실정을 개탄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의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도 하루빨리 소년 교정 관련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고아원을 찾아 원아들과 함께하는 김홍섭(가운데 점선 안).

소년 지원장으로 있었던 이 무렵이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음은 김홍섭의 글에서 많이 드러나 보인다. 단죄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법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었을까. 당시 김홍섭은 남매를 두어 가정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법관으로서도 적이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곧 6 25 전쟁과 피란 시절을 겪어야 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 그는 고등법원과 대법원 판사로 승진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소년범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소년부 지원장을 지낸 지 십수 년 후인 1964년 1월 김홍섭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평소 가까운 사이로 지내던 서정원씨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서정원씨는 1948년 김홍섭이 소년부 지원장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공채 선발한 직원이었다. 법원 내 서열상 차이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판사와 직원 이상의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을 받지 않는 김홍섭이었지만 서정원씨는 유일하게 설렁탕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퇴근 후 둘은 자주 긴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김홍섭의 고민은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내가 고등법원장으로 있는데 소년부 지원장으로 간다고 하면 욕이 될까요?”

오랜 세월 김홍섭의 곁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온 서정원씨로서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펄쩍 뛰면서 극구 만류했다.

“그게 말씀이나 될 일입니까 원장님. 직위가 있으신데요. 그리고 고등법원장하고 소년부 지원장은 월급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직위야 강등시켜 달라고 하면 되지요. 월급이야 주는 대로 먹고살면 되는 것이고요.”

“원장님 자제분들이 벌써 몇이고 가족이 얼마나 되시는데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오늘날까지 그 어려운 생활을 하시다 이제 어느 정도 월급도 좀 오르셨는데요.”

그렇게 말리고 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서정원씨는 더 기가 막히는 소리를 들었다. 고등법원장 김홍섭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오늘 대법원장에게 가서 소년부 지원장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강등시키고 월급도 줄이고 해서 그쪽으로 꼭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물론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사 행정상 불가능한 일이라며 대법원장이 일언지하에 잘랐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섭은 거기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김홍섭은 이렇게 결심했노라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법원에 있어 가지고는 불우한 애들을 돌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 애들을 돌보기 위해서 내가 이 관직을 다 버려야겠어요. 그리고 고아원에 가서 직접 고아들하고 생활하면서 애들을 가르쳐야겠어요. 내가 잘 길러내야겠어요.”

그는 가족들을 생각해보라는 주변의 만류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집사람은 고아원에 가서 부엌에서 밥하면 되고 애들은 고아들하고 같이 공부하면 되죠. 그렇게 하면 고아들 마음에 큰 흠 나지 않고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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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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