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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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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의 빛은 너무 밝습니다

▲ 최정숙

어둔 밤의 의미

정숙의 어머니는 지극 정성으로 딸을 돌보았다. 서울로 유학 가고 싶어 그토록 애쓰고 장학금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졸업장도 없이 혼이 나간 듯 누워 있는 정숙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할 도리를 한 것인데 정작 본인의 심정은 오죽할까. 어머니는 정숙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우편으로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이 배달되었다. 졸업식에 불참한 정숙과 평국의 마음을 헤아린 담임 선생님의 배려였다. 정숙은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자신을 믿고 응원하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때 일본군이 정숙을 찾아왔다. 서울의 경성지방검사국에서 보낸 호송관이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것이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재판이라니…아직 성한 몸도 아닌데 징역형이라도 받으면 옥살이를 어떻게 감당할까…. 앞이 캄캄했다. 정숙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는 심정처럼 고통스러웠다.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하자 79결사대의 전모가 드러나고 모든 혐의는 정숙에게 씌워져 독방에 수감되었다. 정숙은 사상범으로 찍혀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정숙은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있었다. 빛 한줄기 없는 어두움과 살이 터져나가는 혹독한 냉기 자존도 잃은 배고픔으로 비참했다.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있었다. 끝없는 어둠 속 그 끝에 주님이 계셨다. 주님은 정숙과 마주하시고 정숙을 물끄러미 보셨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도 주님은 정숙의 흐느낌을 들어주셨다. 기도를 받으셨으며 차가운 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정숙을 일으켜 세워주셨다. 가혹한 고문과 취조로 내동댕이쳐진 채 몇 날이고 혼절해 있으면 정숙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정숙은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면서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문득 정숙의 귀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다른 감방으로 퍼져 나갔고 형무소 안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이화여전 유관순이었다. 일본군이 철창문을 열고 들어가 방망이를 마구 휘둘러댔다. 방망이 부딪는 소리와 비명이 만세 소리와 뒤엉켰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 사건 이후 일본군의 고문과 취조는 더욱 악랄해졌다. 정숙은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나라를 위해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수감 생활 여섯 달이 지날 무렵 모교인 진명여고의 부교장이 정숙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숙을 석방하기 위해 모교에서 모금 운동을 펼쳐 100만 원을 모아 드디어 가석방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형무소를 나오자 진명의 은사들이 두부를 들고 서 있었다. 정숙은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설움이 복받쳤다.

▲ ◀정숙을 석방하기 위해 모금 운동이 펼쳐져 100만 원이 모였고 정숙은 은사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설움이 복받쳤다. 사진은 서대문형무소 벽과 창살. 정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을 보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바람을 움켜잡는 일

정숙의 건강은 형편없이 나빠졌다. 쉴 새 없는 고문으로 장이 터져 복막에 눌어붙어 버렸다. 정숙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온 제주를 샅샅이 뒤졌다. 고문 독에 좋다는 것은 귀하든 흔하든 모조리 구해 정숙을 돌보았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겨우 일어나 앉게 되자 호송관이 재판을 받으라며 정숙을 다시 잡아갔다. 어머니는 넋을 잃었다.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3ㆍ1 만세 소요 공판이 열렸다. 정숙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8개월을 이미 형무소에서 보낸 정숙은 곧바로 석방되었다. 제주로 돌아온 정숙은 다시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고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정숙과 평국은 먼저 신성여학교를 다시 열자고 했다. 신성여학교는 두 사람이 서울 유학 중일 때 라크루 신부가 전주로 부임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가 문을 닫아 버렸다. 신성여학교가 민족 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이 요구하는 식민 교육을 등한시했다는 이유였다.

정숙은 신성여학교 동창들과 힘을 모아 1920년에 여자 장학회를 조직하고 1922년엔 ‘여수원(女修園)’을 열었다. 신성여학교를 되찾을 초석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주간은 초등 과정 60여 명 야간에는 여성들과 나이 든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습소로 운영했다. 여수원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가 주ㆍ야간을 합쳐 200명이 넘었다.

정숙과 평국은 여수원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평국은 성격이 불같아 학생들이 잠시라도 게을리하면 당장 혼쭐을 냈다. 평국에게 야단맞고 풀이 죽은 학생들을 정숙은 따스하게 다독여 다시 힘을 내도록 격려했다. 정숙과 평국은 오래전의 김아나타시아 수녀와 이곤자가 수녀 같았다.

여수원의 소문을 듣고 남학생들도 공부하고 싶다며 모여들었다. 정숙은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함께 남학생을 위한 ‘명신학원’을 열고 여수원과 합쳤다. 일본군 눈에 명신학원은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민립학교를 민족 교육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명신학교와 정숙을 늘 감시했다.

정숙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단에 섰다. 회복도 되지 않은 몸으로 격무에 시달리더니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정숙을 진찰한 도립병원 의사는 한시라도 빨리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정숙은 명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교단에 서지 못할 수도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숙은 그 길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치료에 들어갔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군은 정숙이 없는 틈을 타 명신학교를 제주공립보통학교로 흡수시켜 버렸다. 관립학교는 일제의 요구대로 식민지 교육을 우선으로 가르쳤다. 병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정숙은 크게 상심하였다. 단짝 평국도 명신학교가 없어지자 억압받는 민족을 위해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의술을 배우고 돌아오겠다며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입학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어둠의 광채

병원에 입원한 정숙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수습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병도 깊었고 마음의 길도 어두웠다. 그렇게 공을 들인 명신학교를 잃고 정숙은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병이야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면 나아지겠지만 자신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숙은 진명여고 시절처럼 해를 마주하고 별을 보면서 기도로 모든 시간을 봉헌했다. 어린 시절 순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천주님께 헌신하겠다고 성모님 발 앞에 엎드려 서원했었다. 어쩌면 진작 수녀원에 들어가 주님이 비춰주시는 길을 따랐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나가면 수녀원에 입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이 비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녀가 되려는 정숙의 기대는 무너졌다. 수도자가 되려면 정치적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데 정숙은 정치범으로 형을 받아 자격이 안 되었다. 나라를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가고자 하는 길에 족쇄가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수녀원에서 정숙을 거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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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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