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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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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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지도

▲ 1912년 대구대교구 첫 사제 피정 후 신자들과 함께했을 때의 서상돈. 뒷줄 왼쪽 흰 두루마리에 수염을 기른 이가 서상돈이다.

우리 영혼의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누구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하느님의 아름다운 말씀을 듣기도 한다. 그 순간 우리 영혼에 저절로 지도가 각인된다.

영혼의 지도.

서상돈에게는 그의 나이 16세 때 이 영혼의 지도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돈은 겨우 9살이었다. 그 나이에 무엇을 알겠는가? 그때 그는 죽음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저 뛰어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그들 형제에게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상돈의 곁에는 큰아버지와 숙부들이 존재했다. 아버지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든든한 형제들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조카를 아끼고 사랑했다. 제삿날이면 아버지는 어린 동생을 업고 또 한 손으로 상돈의 손을 잡고 큰아버지네 집으로 갔다. 한티에 산다는 두 숙부도 먼 길을 등짐을 한 가지씩 지고 왔다. 집안이 북적거렸다. 그래서 제삿날은 잔칫날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의 그 끔찍했던 기간에 세 분이 다 순교하셨다. 큰아버지 서인순이 경산에서 잡혀 대구 감옥에서 돌아가셨고 작은아버지 서익순이 칠곡 한티에서 체포되어 서울 절두산에서 처형되었고 막냇삼촌 서태순이 문경 한실에서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큰아버지가 대구 감옥에 갇혀 돌아가실 때까지 상돈은 옥바라지를 했다. 당시 그들 가족은 여우목(현 문경시 문경읍 증평리 소재)에서 나와 대구에 살 때였다. 상돈은 이마에 막 여드름이 돋기 시작한 16세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과 싸워야 했던 소년은 일찍 철들어 있었다.

감옥에서 만난 큰아버지는 수차례 형벌을 받아 온몸이 으깨지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용이었다. 그런데도 큰아버지는 “나를 놓아준다 하여도 다시 천주님을 섬길 것”이라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도대체 신앙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도 내던질 정도란 말인가?

그러나 상돈은 큰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큰아버지 서인순과 조카인 서상돈은 감옥의 창살을 사이에 두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큰아버지!”

“상돈아!”

두 사람은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른다.

상돈은 굶주림에 지친 큰아버지가 피고름이 엉긴 멍석을 뜯어 먹는 것을 목격했고 소죽을 먹는 것도 보았다. 큰아버지에게 뜨끈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 넣어줄 돈이 상돈에게는 없었다. 그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가난이 한이 되었다.

큰아버지는 제정신이 돌아오면 상돈에게 당부했다.

“절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선 안 된다.”

그 말을 상돈에게 남기고 큰아버지는 순교했다.

얼마나 많은 천주교인이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후 고통스럽게 죽어갔는가? 그때 불린 노래가 우리에게 당시의 슬픔을 말해준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으리.

바람처럼 그렇게 잊히지만 않으면

살아서 부를 이름이야

내 가지지 않아도 좋으리.

내가 살아 부르던 그 이름을

내가 죽어 부르던 그 이름을

바람처럼 그렇게 잊히지만 않으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나는 좋으리.

그들은 이름 없이 죽어가면서도 기꺼이 하느님을 위해서 순교를 택했다. 하느님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망나니의 칼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천주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당시 사회적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있던 하층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또한 사후 세계를 중시하는 천주교의 내세 사상은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교회법에 따라 축첩을 반대하고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억혼을 금지하는 것 재혼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 등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된 것은 이승훈(1756~1801)이 사신의 수행원인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북경의 성당을 방문해 세례를 받고 교리서와 십자가 성패 등을 받아 조선에 돌아옴으로써였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을 이벽과 함께 연구한 다음 주변 지인들에게 전교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빠르게 전파되어 경기 충청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도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양반층뿐 아니라 중인이나 하층민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갑자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순조가 겨우 11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면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정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이다. 노론 벽파(派)에 속한 정순왕후는 정조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도세자를 동정한 시파(時派)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등용했다. 그리고 정권 탄압의 빌미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들을 역적으로 다스리고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철저하게 색출해 처벌하라는 박해령을 내렸다. 무시무시한 신유박해의 서막이었다.

그 후로도 박해는 크고 작게 계속 이어지다가 1866년 병인년에 권력은 천주교에 어마어마한 철퇴를 내려친다.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은 거센 폭우 직전이었다. 이 비극적인 나라는 문호 개방을 요구당하고 있었다. 조선은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1864년(고종 1년)에 러시아가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 요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교도들이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한 불 영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습니다.”

대원군은 귀가 솔깃했지만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에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 이하 정부 대관들이 천주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상돈의 삶도 세 분의 순교로 대전환을 맞이했다.

그때의 기억이 그의 삶에 하나의 꽃을 피웠다. 순교의 꽃! 그 꽃은 단 한 순간에 피었다가 스러졌지만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찬란하게 부활한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진의 그는 이미 늙은이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아직 그때의 소년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비장한 비극의 주인공. 「오레스테이아」(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의 주인공 오레스테스처럼 그는 다짐했다. 아무리 돈을 번다 해도 절대 쌀밥을 먹지 않기로.

그처럼 강렬한 기억이 또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집약되어 그의 삶을 위대하게 재탄생시켰다. 그는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지만 흰 쌀밥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막내 삼촌 서태순의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지게에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한티 마을로 옮기면서 상돈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골고타 언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 만일 어려움에 있거든 말하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거든 그리스도 오늘도 제대 위에서 희생함을 기억하라. 이해하기엔 너무 큰 사랑으로 바쳐진 고통….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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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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