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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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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소금장수

▲ 거상이 된 서상돈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낙동강의 개포나루터. 경북 고령군 개진면에 있으며 개경포라고도 부른다. 고령군 제공

한일수호조약으로 부산항 개항

낙동강 무역으로 거상이 된 상돈

순교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 쌓여

푸른 강이 서상돈 앞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배는 커다란 짐승처럼 강한 숨을 내뿜으며 파도를 넘어 굼실굼실 앞으로 나아갔다. 서상돈은 갑판에 서서 그 푸른 강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왔는가?

그가 걸은 그 무수한 길들.

길 길.

그 길 어느 곳에나 큰아버지와 두 숙부가 존재했다.

그리고 앞에서 항상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셨다. 예수님이 계셨기에 그는 어떠한 슬픔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오랜 기도.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주시고 당신의 손길이 저와 함께 있어 제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재앙을 막아주십시오”(1역대 4 10).

어머니의 기도는 그의 영혼에 등불이었다. 그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신앙의 체험이 결실을 이루는 순간이 왔다. 하느님께서 어머니의 그 오랜 기도에 응답했다. 상돈에게 언젠가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리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랜 믿음이었다.

서상돈이 28세 되던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부산항이 열리고 일본에서 담배ㆍ손거울ㆍ성냥 등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산항 개항으로 당시 부산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고령에 모여 낙동강을 타고 내륙으로 갔다.

낙동강 뱃길 따라

낙동강은 영남 지방의 내륙 수로 교통의 동맥이었다. 낙동강은 「동국여지승람」에 낙수(洛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되어 있다. 영남 지방의 거의 전역을 휘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 년간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영남인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 왔다. 강기슭에 발달한 하단ㆍ구포ㆍ삼랑진ㆍ수산ㆍ남지ㆍ율지ㆍ현풍ㆍ왜관ㆍ낙동ㆍ풍산ㆍ안동 등지는 과거의 나루터 마을이거나 선착장들이다.

서상돈은 낙동강 배편을 이용해 쌀ㆍ소금ㆍ창호지ㆍ기름 등을 장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 거상(巨商)이던 김종학은 장사 수완이 있고 성실한 서상돈을 눈여겨보았다. 1880년 30세에 서상돈은 김종학의 눈에 들어 수안 김씨와 혼인도 하였고 이후 병옥(丙玉) 병조(丙朝) 병주(丙柱) 병민(丙敏) 등 네 자녀를 두게 되었다. 서상돈은 근면과 성실을 밑천 삼아 사업을 점차 확장하여 나갔다. 활동 영역도 점점 넓어져 낙동강을 무대로 부산에서 안동까지 무려 800리 뱃길을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다.

어염미두 무역으로 거상 반열에 오르니

대구는 조선 후기 이래 경상도 내륙 지방의 상업 중심지이다. 경북에서 생산되는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 면화ㆍ대마 등의 의류 인삼ㆍ지황 등의 약재류 감ㆍ밤 등의 과실류 연초 등의 상품작물들의 집산지라 할 수 있다. 상업적 농업의 발전은 낙동강을 통한 무역을 기반으로 이뤄졌고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대구는 경상감영이 설치된 곳이라 행정 중심지의 기능이 상업 발전을 더욱 진흥시켰다.

낙동강 800리 뱃길이 그의 상권이었다. 서상돈은 낙동강의 배편을 이용해 장사 무대를 점점 확장해 나갔다. 취급품과 물량도 쌀ㆍ소금ㆍ베ㆍ기름ㆍ창호지ㆍ건어물 성냥 등으로 많이 늘어났다. 원격 무역은 엄청난 이익 확대로 이어졌다. 특히 온갖 종이와 포목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품목으로 여겨졌고 쌀과 소금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무역 형태인 어염미두(魚鹽米豆) 무역이었다. 서상돈은 부산 쪽의 물고기와 소금을 배로 싣고 와 내륙의 쌀과 콩을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을 통해 많은 자산을 불렸고 부호 반열에 올랐다. 1885년 36세에 서상돈은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인으로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령 개포(開浦)는 사실상 서상돈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개포나루는 인근 다산의 사문진과 함께 낙동강 물류에 큰 획을 그은 곳이다. 개경포 주변에 객주만도 30여 개에 달해 장구 소리와 노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장한 서상돈은 기생을 절대 가까이하지 않았다. 기생도 그의 관점에서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대부호들이 소실을 대여섯씩 두는 것이 흉이 아닌 당시의 전통 사회에서 서상돈은 유별난 존재였다. 오죽하면 그의 부인은 며느리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서씨 가문 남자들은 절대 여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도적 떼들은 개경포를 최고의 사냥터로 지목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도적들도 서상돈의 배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이미 서상돈의 명망은 주변에 널리 알려졌었다.

역병 공포에 떠는 민중들

부산항 개항으로 신식 문물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1821년(순조 21년) 정체불명의 역병이 조선을 습격했다. 평안도에서 처음으로 콜레라가 발생했는데 마땅한 명칭이 없어 괴질(怪疾)이라 불렀다. 이 역병은 “살아서 앓지 않으면 죽어 무덤 속에서라도 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병인 콜레라였다. 질병사가들은 이 콜레라의 공포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질병으로 페스트를 꼽는다. 한 고을 전체가 가족을 잃었던 그 고통의 깊이는 우리의 상상 이상일 터다. 오죽했으면 괴질이라는 말 대신에 ‘호역(虎疫)’이라는 용어를 썼을까. ‘호환(虎患)’과 비슷한 호역은 ‘호랑이한테 찢어발겨 죽게 될’ 정도의 고통이 수반되는 질병이었다.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해 온몸이 비틀어지고 설사가 끊이지 않는 이 병에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옛 조선 사람들은 괴질을 하늘이 노해 인간에게 벌을 내린 것으로 여겼다. 임금은 괴질을 천견(天譴) 즉 하늘의 꾸짖음으로 보고 하늘을 달래기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죄수를 풀어줬으며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또 민간에서는 귀신이 무서워한다는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가 하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영력이 있다는 복숭아 가지를 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역병을 쫓는 여제(勵祭)가 열리고 왕이 직접 제문을 짓기도 했다.

먹는 것이 부실하고 식수가 좋지 않은 민중들에게 전염병은 하늘이 내린 재앙이었다. 보릿고개에 호열자라도 돌면 수십 명씩 죽어 나갈 때도 있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 신호가 오게 되면 누구나 호열자가 아닌가 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뜬소문에도 불구하고 역질이 돌 때마다 감초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소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쌀밥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거부

낙동강 소금장수는 단단히 한 몫을 보게 되었다. 서상돈의 재산이 눈덩이처럼 쌓인 것은 물론이다. 지금 서상돈은 낙동강의 푸르른 물살을 보면서 그 강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삼키고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대구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대 실업가가 되어 있다. 40대에 서상돈은 대구 상권의 중심인물로 거느리는 보부상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이에 서상돈은 안동 군위 김천ㆍ칠곡ㆍ달성 등지에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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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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