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여인이 강변서 빨래하고 다니는 사람들 얼굴엔 활기 없어
▲
▲ ◀북한이탈주민 세 명 중 한 명이 혜산과 중국 장백현 사이 압록강을 지나 남한으로 들어온다. 8월 장백현에서 찍은 혜산시 모습.
▲
TV를 통해 보는 북한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다. 평양 거리에서 고운 한복 말쑥한 정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언제 어디서든 격앙된 모습으로 지도자를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 자기 몸만한 총을 들고 다니는 앳된 모습의 군인들….
‘북한을 실제로 본다면 어떨까.’
TV나 신문을 통해 보는 모습이 아닌 북한의 민낯이 궁금했다. 북ㆍ중 접경지역 탐방 이튿날 북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중국 삼합으로 향했다.
저기가 북한 땅이에요?
“와아 저기가 정말 북한 땅이에요?”
8월 17일 오전. 북한 땅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삼합에 도착했다. 빛바랜 색깔의 지붕 숨 쉴 틈 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가옥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건물들. 삼합에서 바라본 북한 회령시는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집은 낡았고 사람이 사는 곳인가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눈앞에 보이는 북한 땅이 신기해 마을 구석구석을 살폈다. 국경 지역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표지판이나 철책선 하나 보이지 않았다. ‘중국이랑 북한이 이렇게 가까이 사는구나.’ 북한 사람들이 우리나라보다 중국을 더 친숙하게 느낀다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북한 마을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에 기자도 옆에 있는 일행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에 맞춰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외부와 단절된 채 우리 형제들이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현장을 구경거리로 여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합을 떠나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북한의 민둥산이 줄을 이었다. 언젠가 “중국이랑 북한을 한눈에 구분하는 방법은 산에 나무가 빽빽한지 아니면 민둥산인지 보는 것”이라고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탐방을 함께한 윤여상(평화나눔연구소) 박사는 “40~50년 전에는 이 지역에 소나무가 빽빽했는데 땔감으로 다 베어 써버려 지금은 민둥산이 됐다”며 “이제는 산꼭대기까지 밭농사를 지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무가 우거져 푹신푹신해 보이는 우리나라 산과 달리 북한의 산은 능선이 다 보일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북한의 열악한 연료 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거기에다 꼭대기까지 일군 ‘뙈기밭’은 뼈만 남은 아이에게 이곳저곳 해진 옷을 기워서 입혀 놓은 꼴이었다.
18일 중국 장백현에서 보았던 북한 혜산시도 마찬가지였다. 비라도 한 번 내리면 밭이 엉망이 돼버려 작물을 제대로 수확할 수가 없는데도 북한 사람들은 산에 밭농사를 짓고 있었다. 엄연히 불법이지만 정부에서도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모른 척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북한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혜산시. 그곳에서 본 북한의 민낯은 TV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억지스럽거나 위화감이 드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1960~70년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예전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친근했다. 다만 숨길 수 없는 가난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새까만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은 여인은 압록 강변에서 빨래하고 있었고 머리를 빡빡 깎은 어린아이들은 남한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다.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활기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자전거에 오토바이 가끔은 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북한에서는 잘 사는 지역 중 하나라지만 삶의 고단함이 마을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평범할 줄 몰랐네….”
압록강을 따라 걸으며 혜산을 바라보던 김영진(42)씨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독재 간첩 빨갱이…. 북한을 떠올리면 부정적인 단어부터 떠올랐다던 일행은 ‘북한이라고 머리에 뿔 달린 사람들이 사는 게 아니구나’ ‘우리와 똑같이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고 있었다.
글 사진=김유리 기자
백두산 그 절경 앞에서
▲
“백두산 천지에 가요.”
북ㆍ중 접경지역 탐방을 간다고 했을 때 ‘중국’이라는 단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도 ‘백두산’에 간다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것저것 묻곤 했다.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 천지를 가는 코스가 많이 알려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백두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비로움을 주는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탐방 셋째 날인 18일. 일행이 백두산 남파로 향했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갈 수 있는 서파 남파 북파 중 남파는 2009년에야 개방된 곳이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코스이기 때문에 지금도 일반인들에게는 길을 잘 내주지 않는다.
북ㆍ중 접경지역 탐방단은 운이 좋게도 남파로 백두산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감시 카메라가 세 대나 달린 차를 타고 사복을 입은 중국 군인들과 동행해야 했다.
“앞으로 더 가지 마요!”(중국어 번역)
백두산 천지에 도착해 대자연이 주는 경외로움에 감탄하고 있는 찰나 중국 군인이 소리쳤다. 천지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쳐놓은 쇠사슬을 넘지 말라는 말이었다. 사진을 찍으며 ‘파이팅’을 외치려 할 때도 ‘큰 소리를 내지 말라’며 더 큰 목소리로 제지했다. 북한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파(북한에서 백두산을 오르는 길)로 올라왔다면 어땠을까. 백두산 천지의 절경을 중국에 와서야 게다가 중국 군인들의 감시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북한 지역인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음에는 꼭 동파에서 백두산 천지를 올라오리라.’ 안개에 뒤덮여있다가 잠깐 얼굴을 내밀어 준 천지를 보며 다짐했다.
김유리 기자 lucia@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