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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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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을 위해 1906년 2월 21일에는 김광제 서상돈 대동광문회장 박혜령 등이 중심이 되어 대구민의소를 설립하고 창립 총회를 열었다. 또 그날 대구민의소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회하고 여기에서 김광제 서상돈의 명의로 국채보상취지서가 낭독되었다. 서상돈은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

애국에 남녀의 차이도 귀천의 차이도 없었다

특히 이 취지서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우리나라의 침략자 일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포용적 안목” 때문이며 “그 절박한 국망의 위기를 단지 3개월간 단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아주 간편하고 간단한 방법의 제시”에 있었다.

이 군민대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뿌리며 담뱃대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 당장에 수백 원을 모금하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이만한 일도 못 하고 있었는가 하는 자괴심을 국민들로 하여금 저절로 불러일으킬 수 있게 했다.

한편 2월 말에 애국단연회 관계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경북이 어느 도보다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도내 41개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도 서상돈이 홍무장을 맡아 실무를 지휘한 사실은 주목할 일이었다. 또 그 후 4월에는 대구단연회에 서상돈은 1000환(원)을 의연했다.

▲ 대구 동인동(국채보상로)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내부의 국채보상운동 행렬도. 국채보상운동에는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을 넘어 온 민족이 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이 운동은 이처럼 대구에서 발단한 초부터 열기를 더해갔을 뿐만 아니라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기생 앵무는 지화 100환(현재 가치 1억 원)을 가지고 찾아왔고 전국적으로 기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전 국민운동으로 진전된 국채보상운동은 의연금 관리 등 보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통합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07년 4월에는 이를 지도 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도 각각 조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민의소가 북후정에서 개최한 국민대회에 즉각 호응하여 이틀 후인 2월 23일 대구의 여성들은 ‘남일동 부인 7명 은패물 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그날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를 선언하고 「경고(警告) 아부인동포(我婦人同胞)라」라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우리가 일개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도(三從之道)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 여자의 소처로 일신소존이 다만 패물 등속이라.”

이들은 자신의 소유인 은지환ㆍ은장도ㆍ은가지ㆍ은연화 등 총 13냥 8돈쭝의 패물을 의연했다. 대구 여성들의 참여는 전국 여성들의 이 운동 참가의 효시가 되었다. 상류층 양반집의 부인들도 이 운동에 참여해 3월 초에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를 결성하여 국채보상부인회취지서를 전국 부인들에게 보내 여성 각자가 스스로 의무를 느껴 자발적인 의연을 하도록 호소하였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 가락지 은장도 등을 의연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일본 유학생들과 멀리 미주와 노령(러시아 시베리아 일대)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고관이나 양반 부유층은 물론 하층민에 속하는 서울 양반집의 상노 노동자들 인력거꾼 등이 담뱃값을 다투어 거두는가 하면 의연금을 모아 가지고 기성회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노인도 노병을 무릅쓰고 짚신을 삼아서 처와 함께 비지를 사서 연명하고 있으면서도 국채보상에 감격하여 신화 2환을 기성회에 바쳤으며 또한 철없는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받은 세뱃돈 고아원 학도들의 심부름값 등 용돈을 의연금으로 바쳤던 것이다.

전국으로 퍼진 국채보상운동의 물결

이에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민족언론기관들은 이 운동을 자주자강의 구국운동으로 파악하고 앞을 다투어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907년 2월 25일 ‘단연보국채’라는 논설에 이렇게 썼다.

“새봄의 제일 좋은 소식이 하늘에서 온 복음을 외쳐 전하도다.… 이 소식이 다른 소식이 아니라 곧 대구 광문사 부회장 서상돈씨 등의 단연동맹한 좋은 소식이로다. … 전국 3백여 고을에 반드시 대구에서만 이런 남자들이 나올 것이 아니요 동포 2천만 명에 반드시 서씨 등 몇 사람만이 이런 뜻과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감히 믿는다. 이 기운이 한번 움직임에 따라 온 나라가 향응하여 장차 5종의 민족으로 모두들 우리 대한인을 숭배하여 20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명예 성가가 온 지구 상에 환하게 비치게 될 것이다. 장하다 이 소식이여. 기특하다 이 소식이여. 손 모아 빌고 머리 숙여 절하여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고 땅을 굽어보며 춤추노니 곧 후일 대한 독립사 첫머리 제1장에 대서특필하여 해와 별처럼 높이 받들 것이니 단연 동맹회의 서상돈 등이 아니겠는가?”

어느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4환을 의연하였고 평남 영유군 이화학교의 일본인 교사 정유호빈(正柳好彬)도 2환을 의연하는 등 외국인 동참도 증가를 거듭했다.

특히 2월 26일 고종황제의 칙어(勅語: 임금이 몸소 이름)와 함께 단연보상 참여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은 친히 담배를 끊고 영친왕의 가례도 연기함으로 국민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 민적 의거로서 공인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초기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정부 대신들도 이 소식을 접한 이후 금연 결심과 함께 참여하였다.

특히 단천군 국채보상소 발기인 이병덕(李炳德) 김인화(金仁化) 등은 “국채보상가”를 지어 널리 보급하였다.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대구 서공 상돈일세.

1천 3백만 환(원) 국채 갚자고/보상동맹 단연회 설립했다네.

면실하는 마음 발앙하니/대한 국민 분명하도다.

지금 우리 국가 간난한데/누가 이런 열성 가질 건가?

경상도 대구의 서공 등/사람마다 찬미하도다.

복주관 아래 우리 동포여/대구 땅만 나라 땅이냐?

대한 2천만 민중에/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한국 백성 아닐런가?

▲ 대구 동인동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일제의 방해에 빛을 바라다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은 전개방법이나 열성 면에서 단연 앞섰다. 거국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이 운동은 일인과 친일 세력의 거센 반발과 방해공작에도 진행됐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미완성이긴 했으나 국민과 힘과 충정을 만천하에 과시한 민중의 교향곡이었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고 이후에도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이에 일제는 이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여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끈질긴 방해공작으로 성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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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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