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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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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궁창 같은 정치판에 민주주의 꽃피길 기다렸지만…

▲ 1958년 평화신문사 시절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기념 촬영.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양한모.

언론 활동과 경제 활동 포기 그리고 재개

양한모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신문사는 그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무역 회사 운영 또한 신분상의 제약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서 여의치 않았다. 그의 돈이 혹시 공산당에서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있던 참이라 아예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언론사를 세울 궁리를 했다. 언론에 대한 개인적 신념 외에 언론인이 되면 전향자로서 오해와 음모를 피하고 신분을 보장받는 데에 유리하리라는 점도 고려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1953년에 외국의 통신사(로이터)와 연계하여 국내외의 기사와 정보를 다루는 ‘세계통신사’를 세웠다. 그러나 이 통신사는 곧잘 이승만 정권과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았다. 결국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시궁창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로이터 통신 기자의 글을 타전하고는 곧바로 사직서를 썼다.

그 뒤 1958년에 ‘평화신문사’를 인수했다. 친여 성향이던 신문의 체질을 바꾸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문사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제호가 ‘대한신문’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양증권’을 인수하여 증권업에 새로 진출했다.

제2공화국 출범과 5ㆍ16군사쿠데타

1960년 이승만의 자유당은 떠난 민심을 거슬러 3ㆍ15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곳곳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이어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궐기는 4ㆍ19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무렵 양한모는 자주 내왕하던 지인의 집에서 장면을 다시 만났다. 장면은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장면에게서 정치가로서 연륜과 풍모를 새롭게 느낀 그는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 당시 민주당은 국민이 피의 대가로 쟁취한 정권을 물려받을 유력한 정당이었고 장면은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서 비중이 막강했다. 양한모는 당적과 지위를 갖지 않은 채 막후에서 장면을 거의 날마다 만났고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자유당에 맞서 만나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구파와 신파로 갈라져 있었다. 각종 선거에서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대결했다. 의석수가 많아야 자기들이 염두에 둔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제2공화국 출범에서 가장 큰 쟁점은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국무총리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출은 간접선거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양한모는 장면이 총리에 선출되게 하기 위해 구파와 중도파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을 만나서 설득하거나 종용하며 많은 공을 들였다. 어렵사리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출되었고 양한모는 장면이 거국 내각을 구성하는 일도 거들었다. 그러나 장면의 내각 구성안에 각 계파가 거세게 반발했다. 제2공화국은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4차례나 개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켜보던 양한모는 3차 개각 때부터는 아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일단의 군인들이 서울로 진입했다(1961년 5월 16일). 그리고 이내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군사 쿠데타였다. 대통령은 쿠데타를 사실상 인정했고 국무총리는 피신했다. 장면 정권의 자금원이던 양한모 또한 일시 은신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중앙정보부장(김종필)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김종필은 경성사범학교에서 좌익 학생운동을 했던 터라 양한모도 아는 사람이었다. 불안하고 의아한 채로 찾아갔더니 장면의 동창생을 간첩 혐의로 붙잡았는데 중앙정보부가 공산당 관련 수사 경험이 없다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양한모는 공정하고 완벽한 수사를 보장받기 위해 수사에 관여하지 말 것 수사 결론에 이의를 달지 말 것 박정희 의장에게 그대로 보고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수사해 보니 간첩 혐의자는 간첩이 아니었고 장면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란 점 말고는 무관한 사이였다. 이로써 자칫하면 ‘북한-간첩-장면’이라는 엄청난 연결망이 그려질 수도 있는 사건은 공정하게 해결되었고 중앙정보부는 이 결과를 인정했다. 수사가 끝난 뒤 양한모는 증권 사업은 해도 좋으나 정치는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그해 겨울 양한모의 증권회사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평판이 좋지 않아 양한모가 거리를 두던 사람이었는데 중요한 일이라며 만나자고 했다. 혁명 정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증권에 투자하려고 하니 증권을 모르는 그들의 자금을 운용해서 이익을 남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크게 문제가 되거나 나쁠 것은 없겠다 싶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의 조직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꾸민 세칭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인 ‘증권파동’의 단초였다.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하수인을 통해 벌인 일이었다.

당시 양한모는 대한증권거래소 부회장이었고 증권회사 중 세 번째 안에 드는 큰 회사의 사장이었다. 김종필의 부탁을 받은 하수인은 그래서 양한모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하수인은 양한모에게 거액을 맡겼고 양한모는 그 돈으로 주식을 거래해서 수익을 남겨 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그런데 하수인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일부 증권회사들이 자금을 결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가가 폭락하고 많은 군소 투자자들이 큰 손해를 입었다. 군정 당국도 도리 없이 하수인 일당을 구속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양한모와 중앙정보부의 관계는 내내 불편했다. 당시 그는 전자 토건 무역 식품회사 등 5개 기업체를 운영했는데 그가 민주당의 후원자인 것이 마뜩잖던 중앙정보부는 여러모로 그의 사업을 방해했다. 어쨌거나 양한모가 증권회사를 운영하면서 투자자에게 벌어준 돈은 공화당 창당 기금으로 흘러들어 갔고 그 대가로 받은 수수료는 민주당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 간 셈이다.

전향의 철학적 근거 정립이 긴급한 과제

군정은 구악을 일소하고 민생을 살리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개혁 정책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4대 의혹 사건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멀어져 가는 민심에 초조해진 군부 세력은 군정 기간이 끝난 뒤 다시 집권하기 위해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일정 기간 금지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1962년 3월). 처음에 규제 대상이 된 정치인이 4000여 명에 달했고 숱한 항의와 반발 끝에 이듬해 3월에 최종 확정된 인원은 268명이었다.

장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장면은 양한모에게 민주당 재건을 상의하고 부탁했다. 그는 장면의 요청에 따라 박순천 등의 인사와 힘을 모아 민주당을 재창당했다(1963년 7월). 그러나 정치 활동은 하지 않고 2년가량 재정 후원만 했다. 그러다가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그는 정치판을 떠났다(1965년).

당리당략에 치우친 정치인들의 행태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정치보다 더 긴급한 과제가 있었다. 20대에 전향하면서 그는 전향의 철학적 근거를 정립하겠노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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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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