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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북녘 본당]공산당 핍박에도 신앙 이어갔지만…

영유본당 출신 한정련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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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본당 출신 한정련 할아버지

▲ 한정련 할아버지



“북한 전역이 공산화돼 갖은 핍박이 가해지면서 영유본당에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신자들은 열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1948년에서 1ㆍ4후퇴 직전까지 3년여 동안 영유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한 한정련(마르티노, 81, 춘천교구 서석본당)씨는 “공산 치하에서 내무서원들의 기만과 핍박에도 영유 신자들은 눈물 어린 열성을 발휘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영유본당 신자들은 특히 평양 관후리성당을 신축하고자 장롱 깊숙이 넣어뒀던 자식들 혼숫감 패물마저 서슴지 않고 내어놓았고, 내무서원들의 제지에도 너나 할 것 없이 성당 건축 현장에 다퉈 달려갔다”고 전했다.

할아버지(한상린 베드로) 때부터 3대째 신앙을 이은 한씨의 고향은 평남 평원군 공덕면 성교리다. 의사였던 아버지(한태훈 요셉)가 인민병원에 배속되자 부친을 따라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로 이사해서 자라났고, 구원리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신자들이 50명쯤 되는 공동체였는데, 당시 큰 공소였어요. 일제 강점기에 지은 커다란 한옥이었죠. 할머니들은 날마다 공소에 들러 아침ㆍ저녁 기도를 바쳤어요. 회장 따님이 성가를 굉장히 잘 불렀어요. 그때 라틴어 성가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해요. 제가 보기엔 당시 이남 신자들보다 이북 신자들이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저도 그 신앙을 따라가지 못해요.”

4남 3녀, 7남매 중 둘째였던 한씨는 영유 읍내 외가로 와서 영유성당에 다니게 된다. 팔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신앙이 몸에 밴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김경낭 마리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영유본당 성모회장으로 활동하던 이모 김경숙(루치아)씨도 그의 신앙에 한몫했다.

영유본당 마지막 주임인 홍도근 신부에 대해 한씨는 “공산당의 핍박이 날로 밀려와 사목 활동에 제약이 많으셨을 텐데도 무척 활달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품이셨다”고 전했다.

“1949년 초 박해가 심해져 본당 신자들이 홍 신부님을 지키려 했지만 1949년 12월 11일 새벽 신부님이 끌려가는 바람에 본당도 목자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양로원 등 모두가 몰수됐지요.”

단국대 교수로서 평생 후학 양성에 헌신했던 한씨는 “신앙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뎠겠느냐”고 반문하고 “죽을 때까지 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다짐했다.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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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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