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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눈으로 본 병인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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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는 조선교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당시 조선에 있던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했고, 3명은 가까스로 중국으로 피했다. 신자들의 처지는 더욱 끔찍했다. 교우촌은 군졸들에게 유린되고,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은 더 깊은 산중과 비교우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박해. 흩어진 양들. 당시 조선교회 상황과 교회 재건 노력을 제6대 조선대목구장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Felix-Clair Ridel, 한국명 이명복·1830~1884)의 눈을 통해 알아본다.



박해가 시작되고 나서 석 달째 교우집에 숨어 지내고 있다.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내 인상착의를 적은 방이 고을마다 붙었기 때문이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9명의 동료 선교사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았다.

포고령이 내려졌을 때 나는 경상도 지방 교우촌을 순회하던 중이었다. 안드레아라는 교우와 함께 바로 경상도 땅을 떠나 충청도로 왔다. 일촉즉발의 상황도 있었다. 내가 탔던 나룻배에 순찰사가 승선했던 적도 있고, 주막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상복을 입은 나의 얼굴을 확인하겠다고 해서 난감했던 적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충청도 버시니 마을에 도착한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 홀로 중국으로 향한 발걸음

다행히도 여기서 페롱 신부와 칼레 신부를 만났다. 남아 있는 선교사 중 가장 선임인 페롱 신부는 나에게 일단 조선을 떠나라고 당부했다. 그해 7월, 두 신부를 남겨두고 홀로 중국으로 향해야 했다. 교우 최인서와 최선일, 심순여의 도움이 컸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나는 쉬지 않고 프랑스 극동함대가 있던 톈진으로 향했다. 톈진에서 피에르 로즈 제독을 만나 그간 일어난 일에 관해 소상히 밝혔다. 또 조선에 남아 있는 두 신부의 보호를 위해 함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나와 조선 교우들에게 군함에 승선해 뱃길을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함대의 길을 안내한 것은 프랑스가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유일한 바람은 조선 교인들이 천주교를 마음껏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그 일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프랑스 군인들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살육과 강간, 약탈, 방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로즈 제독은 몇 차례 전투에서 조선군에게 패한 뒤 도망치듯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나는 로즈 제독에게 이번 원정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크게 따졌다. 로즈 제독이 함대의 뱃길을 안내해 준 나와 조선 교우들의 신의를 배반하고 우리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프랑스 함대의 갑작스러운 퇴각으로 조선 조정이 승리의 도취감에 빠져 더욱 세찬 박해를 가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역시 나와 조선 교우들이 함대의 뱃길을 안내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천주교인들은 반역자, 조국을 배반한 자, 외국 세력에 동조한 자로 몰렸다. 박해는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 배교자들까지 다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 조선대목구 성직자 회의

병인양요 뒤 나와 칼레 신부는 줄곧 상하이에 머물렀다. 조선에서의 박해가 잦아들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칼레 신부는 병인년과 이듬해 초까지 순교한 교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작성에는 최선일 등 조선 교인들의 도움이 컸다. 나 또한 조선어 문법책과 조선어-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몰두했다. 조선에서 나오면서 아무것도 챙겨 나올 수 없어 작업은 더뎠지만 점점 끝이 보이고 있었다.

1867년 4월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선교사 3명을 조선으로 파견했다. 바로 마르티노 신부와 리샤르 신부, 블랑 신부였다. 특히 블랑 신부는 조선어를 익히는 데 열심이었고, 나와 칼레 신부의 보고서 작성과 문법책, 사전 편찬에 큰 도움을 줬다.

우리는 향후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안들을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 성직자 회의도 계획했다.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조선 교회의 장상이 없는 상황에서, 선임 선교사와 신임 선교사가 보조를 맞춰 선교활동을 재개하려면 통일된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페롱 신부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벌인 덕산 사건(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 사건)에 연루돼 본국으로 송환됐다. 남은 선교사 중 선임인 칼레 신부가 성직자 회의를 발의했다. 나를 비롯한 5명의 선교사들은 1868년 11월 21일부터 12월 8일까지 만주의 성모설지전(聖母雪之展) 성당에서 작은 시노드를 열었다.

나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에 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회의에서는 공동재산 관리 문제, 조선어를 프랑스어로 옮기는 문제, 성모설지전 본당과 인근 지역을 우리 조선 선교사들이 관리하는 문제, 배교자들에게 부과한 보속, 조선에서의 선교사 행동양식 등을 논의했다.

■ 조선으로의 재입국 시도

박해를 피해 탈출한 우리 선교사들은 중국의 상하이, 홍콩,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도 조선으로 다시 돌아갈 다양한 입국로를 모색했다. 칼레 신부는 두 가지 방법을 구상했다.

하나는 과거의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이 어는 시점에 국경에 도착해, 강이 얼면 넘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산둥반도에서 배를 타고 조선의 섬이나 해안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조선을 탈출할 때 썼던 방법을 반대로 쓰는 것이었다.

칼레 신부는 육로를 통해 들어가는 방법을 더 좋아했다. 배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육로보다는 빨랐지만 더 위험했기 때문이다. 칼레 신부는 조선에서 함께 탈출했던 교인들과 함께 요동으로 떠났다. 그는 요동에서 조선인 신자를 먼저 들여보내 상황을 살펴본 뒤, 선교사들이 들어가는 방법을 마련했다. 하지만 변문을 비롯한 국경의 검문이 너무 삼엄해 포기했다. 칼레 신부는 가까스로 배편을 구해 조선인 신자들은 들여보내고, 자신은 만주에 머물면서 중국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조선을 탈출할 때부터 몸이 쇠약해졌던 칼레 신부는 병까지 얻었다. 의사는 칼레 신부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치료받을 것을 권유했다. 조선 입국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던 칼레 신부는 결국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어 그는 1869년 7월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칼레 신부의 기도 응원이 큰 힘이 됐다.

■ 조선대목구장 임명과 조선 입국

상하이에서 본국과 선교사들 사이의 연락 업무를 담당했던 나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1869년 3월 19일자로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이 나를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 입국 실패에 관해 보고하면서 대목구장 임명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 조선대목구장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직위였다. 나는 능력도 모자라고 영성적인 자질도 없었다. 그저 일반 선교사로 조선에서 일하고 싶었고, 나보다 더 유능한 대목구장이 임명되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나를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한다는 교황청의 공식 문서가 도착했다. 로마에서 주교 서품을 받고 돌아온 뒤 상하이에 돌아와 조선어-프랑스어 사전과 교리서 번역에 매진했다.

1873년 말 대원군이 실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바로 북경으로 가서 프랑스 공사 드 조프르와를 만났다. 내 이름으로 조선 정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해 중국 정부를 통해 조선에 전할 계획이었다. 중국 정부가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하면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나서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1875년 1월, 조선을 빠져나와 중국 차쿠에 머물던 나에게 최선일이 찾아왔다. 그는 조선 사정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알려왔다. 고종이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 일을 금지하면서 박해가 줄었다는 것이었다. 그해 9월 나는 블랑 신부와 마르티노 신부를 조선으로 들여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르티노 신부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 결국 이듬해 블랑 신부와 신임 선교사인 드게트 신부가 배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나도 1877년 9월 로베르 신부와 함께 황해도 장산곶에 무사히 상륙했다. 1866년 7월 조선에서 탈출한 지 11년 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우리는 비밀리에 선교에 착수했다.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고 교회 재건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서울에서 관헌들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조선 정부는 사형 대신 추방을 명했다. 이 사실은 조선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나는 1878년 6월 11일 한양을 떠나 24일 의주에 도착했다. 25일 중국 관헌에 인계되면서 조선 땅을 되돌아봤다. “잘 있거라! 곧 다시 보자!” 하며, 조선을 향해 나의 가장 다정한 강복을 주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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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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