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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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45) 불쑥 찾아온 봄

어린 시절 누비던 명동대성당, 교구장 되어 돌아온다니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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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비던 명동대성당, 교구장 되어 돌아온다니 ‘두근’

▲ 1998년 6월 착좌식 전날 주교좌 명동대성당을 찾아 자신의 문장이 붙여진 서울대교구장 주교좌에서 기도하는 정진석 대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 정진석 대주교가 착좌식 전날 주교좌 명동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교황청, 김수환 추기경 후임으로 서울대교구장 임명

김 추기경, 발표 직후 전화로 정 대주교에게 축하 인사

유아 세례·복사활동·사제수품 이어 같은 곳에서 은총



1998년 봄이 되자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새 생명을 받아 개나리, 진달래, 산철쭉을 흐드러지게 피워냈다. 청주 시내를 흐르는 무심천을 벚나무가 둘러쌌는데, 이 벚꽃도 활짝 피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주는 큰 특색이 있는 도시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학생과 학교가 많아 교육도시라고 불렸다. 그 이름처럼 봄이 되자 젊은 학생들의 열기가 도시 전체를 싱그럽게 만들었다.

정진석 주교는 청주의 이런 특징을 무척 좋아했다. 책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젊은 학생들을 보면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다. 정 주교는 얼마 전, 교황이 자신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교황대사관의 전화를 받고 난 뒤, 정 주교는 더욱 자주 깊은 침묵과 함께 기도에 매달렸다.

사실 정 주교는 28년 전 청주에 내려올 때 자신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으로 생각했고, 이와 같은 생각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때문에 정 주교 자신이 서울대교구장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으니 혼란스럽고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 기도 안에서 주님의 답을 듣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작년부터 한국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정년을 맞은 김수환 추기경이 교황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후임자를 결정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98년에 들어서면서 교계 신문도 아닌 일간지들이 차기 서울대교구장 후보 4~5명을 자기들 나름대로 꼽아가며 각 주교의 특징을 경쟁적으로 기사로 쏟아내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대략 K주교, G주교 등이 물망에 올라 있던 상황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자신도 가끔 언론에 사진과 함께 등장하지만 주교회의 의장이란 직함 때문이고 나이도 가장 연장자니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서 구색을 갖추느라 그렇게 했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던 차였다.

서울대교구장 선택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98년 6월 29일 있었던 제13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미사 후 김수환 추기경의 축사를 들은 정 주교는 그 어려움을 단번에 감지했다.

“…정진석 대주교님은 순수 서울 태생이시고 이곳 명동대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은 분이십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노기남 대주교님의 복사를 할 만큼 이미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대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으시고 복사도 하시고, 후에 사제로 서품되신 분이 오늘 서울대교구 대주교로 착좌하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요, 하느님이 일찍부터, 성경 말씀대로라면 정진석 대주교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이 분을 점지해두셨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제가 이번 교구장 교체에 직접 실무 책임을 지고 있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있습니다. 인류복음화성장관 톰코 추기경과 차관 자고 대주교님이 함께 서명해 제게 보낸 편지에서 그분들은 이렇게 썼습니다. ‘후임 서울대주교를 찾는 데는 사실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한 분을 뽑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 새 목자를 인도하시고 그분 안에서 일하시어 그분이 서울대교구를 화합과 진리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한 분을 뽑으셨습니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뜻깊습니다. 정진석 대주교님의 임명은 교황님이 하셨으나,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후략)”

당시 정 주교에게는 임명 소식을 미리 전한 상태였지만, 교황청은 김수환 추기경 후임인 제13대 서울대교구장의 공식 인사 발표를 주교좌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과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 30주년 기념일 이후로 미루고 있었다.

드디어 5월 29일 오전 11시 주교좌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과 김수환 추기경 착좌 30주년 기념 미사가 봉헌됐다. 서울대교구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 이날 미사는 교황청 대사, 각 교구 주교들, 파리외방전교회 부총장 신부 등 내외빈과 정부 측 인사 등 1500여 명이 참석해 성당을 가득 메웠다. 성당 밖의 문화관에서도 신자들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미사에 함께하고 있었다.

주교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정진석 주교도 이 미사에 함께했다. 정 주교는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수많은 신자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자니 인사이동을 한다는 것이 더 크게 실감 났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 성당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감회도 남달랐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던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몇몇 인사들은 정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교황청 공식 발표 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원칙이기에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미사와 축하식 후 청주로 돌아오는 길에 정 주교는 문득 청주교구장에 임명돼 잔뜩 긴장한 채 같은 길을 걷고 있던 28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길을 참 많이도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28년 전 그때와 지금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처럼 많은 것이 변했다. 정 주교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무 말 없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저 넓은 평야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5월 30일 오후 8시(로마 시각 낮 12시) 교황청에서 공식 발표가 나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는 교구장 정년을 맞아 사의를 표명한 김수환 추기경의 사임 신청을 받아들여 후임 서울대교구장에 주교회의 의장이자 청주교구장인 정진석 니콜라오 주교를 임명했다.”

이 소식은 한국의 모든 언론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모 일간지는 관련 기사를 미리 보도하느라 오보를 내기도 할 만큼 관심이 뜨거웠다. 교황청 발표 직후 청주교구청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김수환 추기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 대주교님! 축하드려요. 그리고 내일 보좌 주교님들과 꾸리아 신부님들을 청주로 보낼 테니 착좌식 날짜와 준비를 상의해줘요. 고생 좀 해줘요.”

“추기경님!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사람이 추기경님의 후임자가 돼 송구합니다.”

정 주교가 28년 전 청주교구장으로 발령을 받던 당시에도 모금을 위해 미국에 있던 정 주교에게 김수환 추기경은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준비하겠노라 연락해줬다. 참으로 신비로운 인연이었다. 형님 같은 김 추기경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정진석 주교는 평소에도 김 추기경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주교좌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및 김수환(가운데)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 30주년 경축 미사에 함께한 정 대주교(오른쪽). 가톨릭평화신문 DB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7-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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