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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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 ⑦ 홍건환 신부

철저한 감시와 핍박 속에서도 신자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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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감시와 핍박 속에서도 신자 이끌어

행과 투옥, 학살의 슬픈 역사를 피하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과 순교의 길’을 걸었다.

 

▲ 덕원신학교에서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뒤에 선 홍건환 신부.

 

 

홍건환 신부는 1913년 9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지금의
평북 피현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종락(베네딕토), 어머니는 김씨였고, 6남
6녀 중 차남이었다. 같은 교구 홍도근 신부가 그의 조카다.
  

▲ 아버지 홍종락(베네딕토), 어머니 김씨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는 홍건환 신부.

 

소년 홍건환의 학창 시절은 서울 유학 시절부터 알려져
있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했던 때는 1929년 4월로, 우리 나이로
17세였다. 소신학교라고 해도 따로 시험을 치지 않고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시험을
치렀지만, 높은 입학 경쟁률에도 무난히 합격했다. 학창 시절의 그는 동급생에 비해
공부를 잘했고, 성적 또한 우수했다. 1934년 5년 과정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원산 덕원신학교에 입학해 철학과 신학 과정을 마쳤다. 1940년 4월 28일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에서 평양대목구장 윌리엄 오세아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삼엄한 감시에도 굳건한 사목 활동
 

홍 신부가 사목 활동을 시작한 곳은 대신리본당이다.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 동쪽 선교리 일대로, 1934년 신설된 평양의 두 번째 본당이다.
1940년 5월 패트릭 더피 신부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지만, 불과 6개월 만에 관후리
주교좌본당 보좌로 이동했기에 당시 사목 활동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로부터
2년 4개월간의 관후리본당 보좌를 거쳐 주임으로 부임한 홍 신부는 말도 잘하고 활달한
성품이어서 신자들이 많이 따랐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전원 추방된 비상 상황이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모든 사목을 본당 신자들과 상의해
가며 결정함으로써 사제와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3년 6개월 동안 평양 관후리본당에서 사목한 뒤 신의주본당에
부임한 홍 신부는 성당이 신의주경찰서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일경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사목 또한 제약이 많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신자들의 내적 충실을
도모하며 자립정신과 굳건한 신앙심을 심어줬다.

 

소련군에 맞서 구속된 신부 석방 도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은 신의주본당
공동체는 벅찬 감격에 성당 종을 힘차게 울렸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소련군의
진군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의 발호로 신의주 일대 역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의주본당은 소련 군인들의 새벽잠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타종이 금지됐고, 홍 신부
또한 공산당 입당을 강요당했다. 1946년 초에는 한밤중에 소련 비밀경찰 건물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영어로 진행된 심문에서 “대중 지도자로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소련 비밀경찰이 묻자 홍 신부는 “나는 종교인이기에 주교의
특별 허락 없이 어떤 정당에도 가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법에도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렇다면 당신은 공산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소련 비밀경찰의 질문에 홍 신부는 “당신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가. 공산당은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바와 같이 외국의 간섭 없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이에 그들이 “그렇다”고 답변하자 홍 신부는 “당신의
말이 사실이면 나는 공산당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는 그 방을 나와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이후 홍 신부는 우연한 기회에 한 소련군 장교를 알게
되면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사제관을 자주 찾게 된 소련군 장교를 통해 러시아어를
배운 홍 신부는 단기간에 소련군 사령부를 출입하며 능숙한 대화를 하게 됐다. 나중에는
소련군 장교의 장모에게 고해성사를 줄 정도였다. 또 비현본당에서 운영하던 성심학교를
군 인민위원회에 무조건 양도하라는 요구에 불응한 김동철 신부가 내무서에 구속되자
평양대목구 부감목(현 총대리) 김필현 신부를 도와 소련군에 항의, 김 신부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신자들의 보호에도 평양으로 압송 후 투옥
 

이처럼 어렵게 사목을 이어갔지만, 1949년 5월 14일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피랍되면서 성직자들의 수난도 노골화했고 사목도 어려움에
부닥쳤다. 게다가 당시 신의주본당 관할 지역은 다른 본당과는 달리 1945년 신의주
학생의거의 여파 탓인지 정치보위부에서 본당 신부와 신자들 간 자유로운 접촉을
하지 못하게 했고 모임마저 금지했다. 홍 신부는 타 본당 사제들과는 물론 본당 신자들과도
왕래나 접촉이 완전히 끊겼다. 정치보위부원들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주일 미사만
간신히 봉헌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도 몇 개월뿐, 박해 막바지에는
신의주시 진사동에 있던 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 전체를 공산당에 몰수당했다.

 

홍 신부는 결국 신의주본당 총회장이던 이석태(베드로)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주일 미사를 봉헌해야 했고, 홍 신부의 방에는 늘 두세
명의 정치보위부원이 교대로 찾아와 지내다시피 했다. 이를 본 신의주본당 신자들은
2층 숙소 아래층에 두 명씩 교대로 숙직하며 홍 신부를 지켰고, 평일 미사 때도 30∼40명의
청년 신자들이 참석해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
 

그러던 중 1949년 12월 10일, 밤늦게까지 홍 신부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던 정치보위부원들이 방을 나가는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홍 신부를
밖에 대기하던 차량에 태워 연행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홍 신부가 평양으로 압송돼 평양 인민 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이후 홍 신부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평양
인민 교화소의 다른 투옥자들과 마찬가지로 10ㆍ20 UN군의 평양 수복 직전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 1940년 4월 28일 관후리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는 홍건환 신부.

 

 

홍건환 신부는

△1913년 9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태생

△1934년 4월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1940년 덕원신학교 졸업

△1940년 4월 28일 관후리 주교좌성당에서 사제수품  

△1949년 12월 10일 밤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 피랍
행방불명

△소임 : 대신리본당 보좌, 관후리본당 보좌ㆍ주임,
신의주본당 주임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자료 제공=평양교구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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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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