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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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4) 방콕에서의 첫 번째 소임

아시아 복음화 위한 사제 양성에 열정 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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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복음화 위한 사제 양성에 열정 쏟다

▲ 19세기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모습. 변발에 중국 복식이 이색적이다.

▲ 브뤼기에르 신부는 “샴 사람들은 키가 보통이고 구릿빛 피부색을 하고 있으며 호기심이 많다”고 소개했다. 그림은 19세기 당시 샴 여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


브뤼기에르 신부는 방콕에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소임은 신학교에서 본토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기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에서 대신학교 교수로 오랜 기간 재직한 바 있었다. 그는 매일 신학 2시간, 라틴어 4시간, 매주 성경 2시간을 강의했다.  

그는 또 연로한 교구장을 대신해 교구 행정 일을 도맡아 했다.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교구의 주요 살림살이를 챙겨야 했다. 샴 언어를 익힌 후에는 본당 사목도 병행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교구 행정과 신학교 운영, 본당 사목 등 세 가지 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은 선교사로서의 헌신적 사명감과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자신의 소임 중 가장 우선으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다. 본토인 사제를 양성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정신을 따르는 것일 뿐 아니라 교구의 운명이 사제 양성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틈날 때마다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 지원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조국에 보냈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신부가 방콕에서 사목한 지 2년째 되던 해인 1829년 교황청에 한 통의 편지를 쓴다. 브뤼기에르 신부를 자신의 후임으로 샴대목구장 계승권을 가진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해 달라는 청원서였다.

이 무렵 교황청은 1824년(혹은 1825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청원을 고려해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대목구로 독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Bartolomeo Alberto Cappellari) 추기경은 1827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본부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맡아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낸 1815년 12월 29일자 편지. 이 편지에는 조선 교회가 박해로 완전히 파괴됐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조선 선교를 위해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시도를 펼쳐왔다. 교황청은 1807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에서 1801년(신유년) 박해가 일어나 교회가 초토화됐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은 후 처음으로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기는 데 따르는 위험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포교성성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가능한 한 빨리 선교사 한 명을 조선에 보낼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요청하고 중국 신학교에서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도록 권고했다. 또 서로 편하게 연락하도록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 신자 공동체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교황청의 이러한 권고는 구베아 주교가 1808년 7월 6일 선종하면서 성과 없이 흐지부지돼 버렸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815년 12월 30일 구베아 주교 후임으로 북경교구장으로 임명된 요아킴 데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보내온 편지를 접수한다. 그 편지에는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신자들이 쓴 1811년 음력 10월 24일(양력 12월 9일) 자 교황께 보내는 서한이 들어 있었다. 조선 신자들이 교황께 보낸 서한에는 “성직자를 보내 줄 것”과 “선교사들이 어려움 없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최선책은 교황이나 포르투갈 왕이 파견한 사절단이 선교사와 함께 배를 타고 오는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포교성성 관계자들은 이 편지 내용을 보고 경탄을 했다. 조선 신자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복했다. 모두 조선 선교지에 시급하게 사제를 파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포교성성은 선종한 북경교구장이 갖고 있던 조선 선교지 관할권을 누가 이어받을지, 선교사들을 직접 조선에 보낼지, 포르투갈 왕실 사절단을 요청하는 우회로를 이용할 것인지 등을 논의한 끝에 중국 현지 사정이 밝은 마카오의 포교성성 극동 대표부장 마르키니 신부에게 북경에서 추방된 이들 가운데 조선에 보낼 선교사 한 명을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청나라 가경제는 1811년 천주교 금교령을 내리고 궁중 공직에 있는 서양 선교사를 제외하고 북경의 모든 서양 선교사를 추방하고 북경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선교사가 체포되면 ‘간첩죄’와 ‘사교(邪敎)유포죄’ ‘풍속 문란죄’ 등을 적용해 극형에 처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이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보이자 중국의 선교 보호권을 갖고 있던 포르투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금교령으로 자신의 사목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경에 머물러 있던 북경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는 중국 남경 출신 신 플로리아노 벨로조(Xin Florien Vellozo, 43) 신부와 밤 요한(Vam Jean, 29)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겠다고 교황청에 보고한다. 그러면서 사라이바 주교는 밤 신부를 조선 선교지 총대리로 임명한다. 북경교구장이 갖는 권한 안에서 모든 상시적 권한과 특별 권한(혼인 장애 관면, 이동 제대 축성 등)을 밤 신부에게 위임했다. 또 밤 신부가 부재시 신 신부가 똑같은 권한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신 신부는 지방 장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상인이었으나 부인이 죽은 후 서른다섯 살이 넘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밤 신부는 신 신부보다 한문에는 능통하지 않으나 품행이 바른 사제였다. 이들의 첫 번째 임무는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 두 신부는 1817년 1월 4일 남경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출항했지만, 입국에 성공하지 못했다. 신 벨로조 신부는 병에 걸려 조선 관문에서 숨을 거뒀고, 밤 신부도 남경으로 돌아온 후 사목을 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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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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