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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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교구 설정 90주년 특집] 잊힌,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연길 교회 어제와 오늘 (하)

죽음으로 지킨 ‘신앙의 불씨’에 성령의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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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부터 2년간 중국 공산당에 억류됐던 알빈 슈미트 신부가 자신의 남평수용소 시절을 재현한 삽화. 수도자들이 밭을 갈고 장작을 쪼개고 통나무를 베는 노동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 2008년 주일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서는 할머니들과 연길본당 주임 염창원(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DB

▲ 오늘날 연길 교회 지역별 성당.



봄은 짧고, 겨울은 길었다. 1945년 8월, 일본 관동군이 패주하고, 소련군이 진주했다. 관동군이 지배하던 만주의 도시들은 화염에 휩싸였고 잿더미로 변했다.

연길교구 선교 또한 갈림길에 섰다.

그럼에도 연길대목구장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아빠스는 “선교사는 남는다”는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선교지에 남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만주를 비롯한 대륙 전역을 장악하며 선교의 꿈은 아득해졌다. 기나긴 수난의 서막이 올랐다. 선교사들은 사제관과 수녀원에서 체포됐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도 결국 몰수됐다. 포도밭은 파괴되고, 어두운 밤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길은 구원과 부활을 잉태한 은총의 길이 됐고, 연길 교회는 되살아나고 있다. 연길 교회의 수난과 부활의 꿈을 돌아본다.



주님의 포도밭은 무너지고

“우리는 공동체가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 슬픔은 직접 신자 공동체를 돌본 사목자만 느낄 수 있다. 안으로는 아직 튼실하지 못한 공동체, 밖으로는 성당과 학교에 수년간 공들여 이룩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우리 포도밭이 무너지고, 텅 비고, 황폐해지는 모습을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 부서진 성당에서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 결국, 지성소를 지켜내지 못했다….”

1945년 말 간도 교회 상황을 「연길 연대기」는 이렇게 전한다.

1945년 9월 팔도구본당 엥겔만 젤러 수사가 소련군에게 총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선교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체포되고, 인민재판이 벌어지고, 굶주림과 박해 속에서 죽어갔다.

1946년 4월, 국제적 비난을 우려해 그나마 수도원을 보호하던 소련군의 철수는 연길교구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그해 5월 팔로군(훗날 중국인민해방군)이 수도원에 들이닥쳐 수도자들을 체포, 투옥했다. 독일 국적 수도자들은 나치로 몰렸고,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고발됐다.

수도자들은 연길 감옥과 화룡 삼도구성당을 거쳐 삼도구에서 50㎞가량 떨어진 조ㆍ중 접경 남평수용소에 억류됐다. 지금의 남평통상구가 자리한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남평진 남평촌으로, 함북 무산군과 맞닿아 있다.

당시 폐렴을 앓던 브레허 주교아빠스와 수도자 29명, 수녀 3명 등 33명은 일제강점기에 군사훈련을 하던 합숙소였던 방 3칸짜리 초가집에 2년간 갇혀 있어야 했다. 배급은 해줬지만, 굶주림에 시달렸고 고량(수수)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때로는 노력동원에 끌려가 도로 공사에 투입되는 등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1947년 3월에는 합마당본당 초대 주임 보니파시오 쾨스틀러 신부가 두도구본당 사제관에서 영양실조로 숨을 거뒀다. 그해에 벌어진 2차 청산 때는 ‘혁명 인민군’이 수용소에 난입, 수도자들이 덮고 자던 낡은 이불과 내의, 전구, 밥그릇까지 몽땅 압수해 트럭에 싣고 갔다.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 십자가와 성상, 성화는 다 부쉈다. 그러고 나서는 수도자들 손에 부서진 십자고상 조각을 들리고는 ‘조리 돌리기’를 했다.

코르비니안 슈레플 신부는 자신의 자서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에서 남평수용소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짚으로 이은 지붕은 다 썩었고, 천장은 비가 새 얼룩졌다. 문도, 창문도 없었고, 벽은 온통 구멍투성이였다. 마룻바닥엔 먼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어떻게든 살아야겠기에 이 집을 청소하고 대강 수리도 해야 했다.… 또 고량밥을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동네 부인들을 찾아가 밥 짓는 방법을 배웠다. 우선 수수쌀을 초벌로 삶은 뒤 거기서 우러난 붉은 뜨물을 버리고 행군 다음, 다시 밥물을 부어 밥을 안쳤다. 하루 세 끼니씩 30명분 식사를 이런 식으로 지어야 했다….”

일시 ‘종교의 자유’를 내건 중국 공산당 덕분(?)에 수도자들은 연길이나 용정으로 되돌아갔지만, 결국은 모두 추방당했다. 1948년에서 195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연길 교회는 잉걸로 다시 불타오르고

선교사들은 추방됐지만, 교회는 류위팅 신부 등 중국인 사제들에 의해 겨우 목숨줄을 이어나갔다. 1957년 중국에 관변 천주교 조직인 천주교애국회가 설립되면서 그 산하로 들어갔고 자양(自養), 자전(自傳), 자치(自治)의 3자 원칙이 중국 교회정책으로 정립되면서 교회의 어려움은 가중됐다.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66년부터 10년간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으로 연길 교회는 또다시 초토화됐다. ‘간도의 로마’로 불리던 팔도구본당이 1968년 용정 제2고급중학교 홍위병들에 의해 무너진 게 대표적 사례다. 팔도구성당까지 무너지며 연길 교회는 몇몇 소규모 신앙 공동체로 명맥을 이었다. 교구장 서리직도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2대 라이문도 악커만 신부(1950∼1954년), 3대 티모테오 비테를리 몬시뇰(1954∼1980) 등이 승계했지만, 지금은 교구장 서리직을 누가 승계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수난의 길을 걷던 연길 교회가 기사회생한 건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였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최초로 엄태준 신부가 1989년 10월 지린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으면서 연길 교회는 재건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연길 교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ㆍ용정ㆍ화룡ㆍ혼춘ㆍ안도ㆍ도문본당 등 6개 본당이 중심을 이룬다. 연길 주임은 염창원 신부가, 안도 주임은 윤덕헌 신부가, 용정ㆍ화룡 주임은 조광택 신부가, 도문 주임은 리광필 신부가, 혼춘 주임은 권혁화 신부가 맡았고, 엄 신부는 현재 휴양 중이다. 조선족 신자는 대략 700여 명, 중국인 신자까지 합쳐봐야 3000여 명에 그친다. 하도 박해를 많이 받아 교적에 이름을 올리길 꺼려해 교세 통계는 정확하지 않다.

1946년 5월 중국 공산당에 몰수됐던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은 54년 만인 2001년 지린교구 지린시 코첸(口前)성당 내에 복구됐고, 2014년 지린시 썽허징(雙河)으로 수도원을 이전, 두샹우(노르베르토) 원장 신부를 비롯해 종신서원자 4명, 유기서원자 2명 등 6명이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조선족 손철호(바실리오) 수사 신부도 연길 수도원 공동체의 일원이다. 올해 6월 17일에도 체지쉬안(암브로시오) 수사와 왕양(그레고리오) 수사가 첫서원을 했다.

뿌리째 흔들렸던 연길 교회는 이제 지린교구의 조선족 출신 성직자들과 복구된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공동체를 수레바퀴 삼아 연길교구 설정 100주년을 향해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걷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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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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