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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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소장의 식별력과 책임의 성교육] (44) 원치 않은 생명과 고통의 삶

책임지지 못할 사랑… 고통과 절망 대물림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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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 없는 남녀의 결합은 당사자들의 불행은 물론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배 속 태아의 죽음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운 좋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태아도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부모의 고통을 이어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느낌이다. 아니, 죽음보다 더 심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어린 아이이며, 어딘가 숨을 곳을 찾는 중이다. 하고 싶은 질문은 너무 많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왜 나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까? 나는 왜 존재할 권리도 없는 것 같고, 왜 나는 살고 싶은 마음보다 죽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할까?”



태중 상처의 인식과 생명의 성교육


낙태 실패로 태어난 후, 사랑 가득한 부모에게 입양돼 성장한 19세 여학생의 일기다. 부모의 지극한 돌봄을 받아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 소외감이 끊임없이 올라오기 때문에 삶은 고통 그 자체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사고를 겪으면서 그는 무의식 속 분노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한다. 영화 ‘옥토버 베이비(October baby)’의 시작 부분이다. 이런 고통이 영화 속만의 일일까?

영화 ‘옥토버 베이비’를 보니 낙태가 절대 여성의 권리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원해서 태어나는 아이와 원치 않게 태어난 아이의 차이를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마음에 잠재해있던 상처와 대면하니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아프네요. 저는 딸만 여섯인 집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모진 시집살이와 남편의 학대를 당했고, 제 위로 몇 번의 낙태를 했다고 하시더군요. 혹시나 하고 저를 낳았지만, 아들이 아니었기에 엄마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제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나 봅니다. 저는 아직도 사춘기 어린애처럼 부모님께 반항하고 있어요.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오늘 ‘옥토버 베이비’를 보다 깨달았어요. 부모가 절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저를 분노케 한 거였어요. 평생 저를 따라다녔던, 제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근원적 분노의 원인이 영화를 보는 중에 인식됐습니다. 타인이 나의 존재 가치를 정하는 일, 그것도 날 가장 사랑해 줘야 할 부모가 날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 무의식 깊은 곳에 분노가 있는 이유였네요.

저는 모든 걸 다 가져도 불안하고 부족했고, 사랑하고 사랑받아도 끊임없이 죄책감이 느껴졌는데, 그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의 출발점부터 실망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그걸 만회하려고,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제 행동이 이제 이해가 가네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는 저 자신을 볼 때마다 ‘난 왜 그럴까?’ 싶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낙태 당하지 않은 건 어떤 비구니 스님 덕분이었는데,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출생 트라우마 때문인지 저는 꼭 원하고, 준비된 상태에서만 임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또래들보다 이성 관계에 보수적이었고, 낙태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이었는데 그 원칙을 깨는 사건이 있었어요. 갓 스무 살 무렵 친한 친구가 전화해서 제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했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낙태하러 함께 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가지 말아야 했지만, 남자친구는 책임질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혼자라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친구가 불쌍해서 낙태가 죄짓는 일인 줄 알면서도 친구를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마취에서 덜 깨어 비틀거리며 회복실로 들어오는 친구를 보는 심정은 차마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참담하더군요. 친구의 남자친구는 전화 한 통으로 의무를 완수했고, 저는 생명을 저버리는 행동에 동참한 공범이 되어버렸습니다. 즉석 미역국으로 몸조리를 대신한 친구는 그 남자친구와 얼마 안 가 헤어지더군요. 그 남자는 제 친구를 성적 욕망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지요.

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간호사로 수술실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건의 낙태수술을 보았어요. 석션통을 비우고 태아 시신을 폐기물 상자에 담아 처리할 때마다 저는 미안하다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부모들을 대신해 사과하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저만은 절대 낙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낙태하느니 뱃속 아이와 같이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귀면서 저 또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어요. 늘 불안해하는 제게 남편은 아이가 생기면 낳으면 된다고 했지만, 그건 제 인생 계획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본인만의 욕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히 혼전에 임신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지요. 첫째를 낳고 3년 터울로 둘째를 낳았는데 중간에도 원치 않는 임신이 될까 봐 전전긍긍한 적이 많았고, 둘째를 낳고도 셋째가 생긴 건 아닐까 테스트기를 사용하며 가슴을 졸였지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있는 저도 경제 상황과 직장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는데 미혼여성이나 청소년들은 오죽할까요? 임신은 분명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인데, 그런 일을 너무도 안일하게 대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장님의 연수 때 “성관계와 임신은 필연적 인과관계이며, 성적 결합이 생명으로 직진하는 대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그래,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도 당연한 임신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피임이라는 요행만 바라고 살아왔음을 반성했습니다. 보건교사인 저는 또 고민에 빠졌습니다. 늘 해오던 대로의 수박 겉핥기식의 성교육을 할 것인지, 성교육 연수와 영화 ‘옥토버 베이비’를 통해 깨닫게 된 진솔한 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줄지 말이죠. 교사로서 저는 몹시 어려운 숙제를 받은 느낌입니다.

-한 보건교사의 글-



태중 내침과 고통의 삶

원치 않은 생명이 가게 되는 길은 내침이다. 가장 극단적 형태가 엄마 배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낙태고, 낙태는 면하더라도 존재를 거부당한 상처는 무의식에 각인돼 다양한 형태의 불안이 삶을 이끈다. 태중에 생명이 생겼을 때 그 부모가 품는 생각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장대한 영향을 미친다. 성(性)은 그저 피임만 잘하면 되는 놀이가 아니라, 성관계와 임신 그리고 새 생명이 살아갈 인생. 이 세 가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삶의 과업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를 망각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 죄의 짐을 다음 세대에 내려보내 자손들의 삶까지 고통스럽게 만든다.


<사랑과 책임 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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