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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0주기] 여전한 성장 신화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빌어주소서

김수환 추기경님께 띄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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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2월 24일 행당 1-2 재개발지구 철거지역을 방문해 주민들을 위로하는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님,

추기경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미 주님 곁에서 그분의 자비와 사랑 안에 영복을 누리고 계시겠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사고만 치는 세상 인생들을 바라보며 추기경님 미간에 깊이 파인 내 천자 주름을 펴지 못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요.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고 추기경님 가르침과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글을 쓰라고 하네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추기경님 생전의 말씀과 행적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복기하는 글들과 기록들을 수없이 쏟아져 내왔는데, 저까지 새삼 더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넋두리나 말씀드릴까 합니다.



계속되는 재개발로 쫓겨나는 사람들

추기경님, 세상 떠나시기 불과 한 달 전쯤 일어난 용산 참사를 기억하시지요? 재개발에 반대하는 30여 명의 주민과 경찰 특공대, 용역 직원들 300여 명이 충돌하면서 망루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불에 타죽었지요. 그런데 법원은 철거민 9명에게 징역 4년에서 5년을 선고했습니다. 이 선고를 내린 이는 2년 후에 대법원장으로 승진했고, 수사를 지휘한 서울중앙지검장은 후에 검찰총장으로 승진했고, 철거작전을 지휘한 이는 경찰청장을 거쳐서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어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도 그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당시 진압은 정당했고, 지금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가족들은 여전히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지요. 아마 추기경님이 계셨더라면 그들은 추기경님께 달려가서 답답함을 토로하였을 것이고 추기경님은 그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어루만져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추기경님, 상계동 철거민들이 집을 빼앗기고 난 다음 명동 주교관 바로 옆에 와서 몇 달을 천막치고 농성하며 외치던 일 기억하시지요? 30년도 더 지났는데 그놈의 재개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가난한 이들이 보금자리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에도 아현동 재개발 구역에서 몇 번을 쫓겨난 37세 세입자가 절망하여 한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도대체 가난한 이들을 끊임없이 변두리로 쫓아내고 목숨까지 빼앗는 재개발은 누구를 위해서 계속하는 것인지, 왜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갖지 못하는지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추기경님 계시면 이 답답한 마음 나누고 싶답니다.



제2공항 갈등에 몸살 앓는 제주도

추기경님, 추기경님도 예전에 제주를 많이 좋아하시고 여러 번 방문해 주셨지요?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정부가 성산포 쪽에 제주 제2공항을 만들겠다고 선언을 해서 제주는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정부는 주민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주민대표가 제2공항 반대 단식을 38일이나 하다가 결국 건강 악화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단식입니다. 그는 고향 땅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옛날 추기경님이 와 보셨을 때와 지금의 제주는 많이 변했습니다. 이주민과 방문객이 너무 많아져서 ‘오버투어리즘’이란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답니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제주도가 수용 가능한 인구는 약 70만 명이라고 하는데 제주도민이 이미 69만을 돌파했고, 항시 와 있는 관광객 약 3만 명을 포함하면 72만의 상주인구에 도달한 셈입니다. 이 인구가 쓰고 버리는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제주도 내 쓰레기장은 지금 더 이상 처리가 불가능한 포화 상태라서 외국으로 비싼 돈 주고 내보내고 있지요. 지금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 쓰레기 자기네들에게 수출하지 말고 도로 가져가라고 시위하고 있습니다. 또 생활하수도 과도하게 배출되어 하수종말처리장들이 한계에 와 있습니다. 충분히 정화처리하지 못 한 하수를 바다로 계속 흘려보내 제주의 바다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목방문을 나가보면 신자 해녀들이 바다 밑에 백화현상이 일어나 해조류가 사라진다며 하얗게 변한 돌멩이들을 보라고 가져옵니다. 제주의 생명줄인 바다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서울시민들도 즐겨 마시는 제주의 생수도 앞날이 대단히 걱정됩니다. 제주는 오로지 지하수로만 살아가는데 지하수를 너무 퍼 올리기 때문에 해수가 지하수층에 유입되어 해안가 용천수에서 측정되는 염도가 갈수록 높아가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이미 수용 가능한 인구를 초과하여 생태계 질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정책 결정자들은 제주에 공항을 하나 더 짓고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재개발도 그렇고 제2공항 문제도 그렇고 제가 보기에는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아직도 개발 위주의 성장만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이런 종류의 발전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데 한국만 6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성장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 계시면 큰 소리로 일갈해주실 텐데, 추기경님의 부재가 너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

추기경님께 불평불만만 구시렁거렸습니다만, 지난 10년 동안 꼭 어두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오랜 싸움 끝에 복직이 되었고요, 2006년 일자리를 잃었던 KTX 여승무원들이 2018년 코레일 정규직 사원으로 복귀했고요, 75m 굴뚝 위에서 1년 반씩 고공농성을 하던 파인텍 직원들도 회사와 합의가 되어 내려왔고요, 그리고 남북 관계에 획기적인 평화 협상이 진척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시원한 일은 제주 4·3 때 재판 절차도 다 생략하고 체포되어 7년에서 10년씩 형을 살고, 그 후로도 평생 전과자로 당국의 감시 속에서 살아온 수형자 18명에게 제주지방법원이 최근 무죄 선고를 한 일입니다. 무려 70년이 걸려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지금 80대 후반과 90대에 달한 어르신들이 무죄 선고를 받고 얼마나 환하게 웃고 기뻐하는지 그 얼굴을 추기경님도 하늘에서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이 아직 너무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환하게 웃음을 되찾는 분들도 있으니 희망을 잃지는 말아야겠지요? 추기경님, 저희가 이 희망으로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살아가도록 하느님께 찬조 발언과 간구를 부탁드립니다!



제주에서 강우일 드림

(제주교구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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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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