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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4·끝)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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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철 신부(예수회)


▲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파레르모니알에서의 죽음
쇠약해진 상태에서 그는 다시 프랑스 리옹으로 돌아와 수사들을 위한 영적 지도자로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요양을 위해 다시 파레르모니알로 보내진다. 그 후 어느 정도 기력을 찾고 알라코크 수녀를 두 번 더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한 열이 다시 그를 덮쳤고, 결국 일주일여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1682년 2월 15일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알라코크 수녀는 콜롱비에르 신부의 지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울지 마십시오. 그분께 청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그분은 당신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심께 대한 신심으로 하늘에서 그분은 큰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또 그분이 당신 삶의 그 어떤 곳에서 이룰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그의 동료 예수회원조차도 그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콜롱비에르 신부는 사망 직후 장엄한 의식이나 행렬도 없이 학교 성당의 무덤에 묻혔다. 당시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기록 담당자(예수회 모든 공동체의 기록들은 3년마다 로마로 보고됐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기록할 만한 일, 혹은 우리 연감에 쓸 만한 일은 없었다.” 이처럼 특별히 가까운 몇몇 지인들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는 그저 평판 좋은 사람이긴 했으나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아무개’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나 시골의 한 공동체 원장으로 일했고 모두가 악마에 씌였다고 못 박은 한 수녀를 홀로 옹호하여 같이 비난받을 위험에 노출되었던 영적 지도자. 영국에선 누명을 쓰고, 건강도 잃은 채 돌아와 영영 회복하지 못한 딱한 선교사. 어쩌면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크게 꽃 피울 기회를 잃어버린 불운했던 사제로 보였을 것이다.

 

주님의 완벽한 친구
 

하지만 주님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라고 하신 말씀은 무관심 속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일까. 예수님의 관점 또는 콜롱비에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인이 남긴 묵상, 강론, 영적 일기 등은 그가 주님과 나눈 인격적이고 고유한 관계 즉 ‘친교’에 관해서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성인은 살아 있을 때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글 또한 출판을 목적으로 쓰인 것들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제3수련 영신수련 피정 기간 중 예수님의 잡히심에 대해 묵상할 때 성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두 가지가 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첫째는 당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앞으로 나서시는 주님의 태도다. 그분의 가슴은 극심한 비통함 속에 빠져 있었다. 모든 정념이 속에서 날뛰었고 모든 본성이 조화를 잃었다. 이 모든 혼란과 유혹 가운데서 그분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었다.… 최고의 덕이 이끄는 쪽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둘째는 당신을 배신할 유다, 수치스럽게 도망쳐 버릴 제자들, 더 나아가 그분이 겪는 박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제들과 일당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이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 안에 그 어떠한 증오나 분노의 움직임도 일으킬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비통함과 완고함이 없는 이 마음, 원수에 대한 진실된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이 마음을 내 앞에 모신다.”
 

성인은 누구보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 깊이 깨닫고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 마음을 체험한다. 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의 결정은 어떠할 것인가? 성인의 삶은 그것이 오만과 방종이 아니라 겸손과 순명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가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 위해 좋아하던 노래도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 자발적으로 예수회의 모든 규칙과 권고를 따르겠다고 서원한 것에서, 우리는 자만한 금욕주의자의 완고함 대신, “사랑받고 용서받은 죄인”의 심정과 그 떨림을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미천한 것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함’ 안에서 가장 완벽한 우정을 보시지 않았을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의 유일하고 참된 친구이십니다. 제 환난과 함께해 주시고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제가 어려움을 아뢸 때, 친절하게 들어주시고, 항상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밤이든 낮이든 어느 때건 저는 당신을 봅니다. 어딜 가더라도 당신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제 거처가 바뀌어도 당신은 거기 계십니다. 당신은 지치지 않고 제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제가 당신을 그저 사랑하기만 한다면, 저를 사랑해 주실 거라 확신합니다. 제가 가진 세상의 것들은 당신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주심으로써 결코 가난해지지 않으십니다. 저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 어떤 더 고귀하고 명민하고 심지어 거룩한 이들도 당신과 제 사이를 막고 당신과의 우정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다른 친구들과 우리를 갈라놓을지언정, 당신과 저를 영원히 하나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이 듦에 따른 모든 모욕과 불명예가 결코 당신과 저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모든 것이 저를 모함하고 압도하고 억압하는 것만 같을 때, 그때 저는 당신을 가장 충만히 향유하고 당신은 제게 가장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지극한 인내로 제 잘못을 참아 주시고, 심지어 제가 충실치 못하고 감사를 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가 당신께 돌아갈 때 저를 받아주시지 않을 정도로 당신께 상처를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 예수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당신께 대한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콜롱비에르 신부는 1929년 6월 16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2년 5월 3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축일은 2월 1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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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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