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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 (3)

그리스도의 향기 풍긴 ‘길 위의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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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성 베드로 파브르,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출처=가톨릭굿뉴스


1534년 1월 파브르는 파리로 돌아와 수품을 준비했다. 그는 성품성사를 위한 서류들을 정리했다. 이냐시오는 그에게 영신수련을 받도록 권했다. 파브르는 학교에서 피정을 하지 않고, 생 자크 거리에 있는 작은 방에 머물렀다. 매우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는 난방을 하지 않았다. 아침 미사 후에 몇 방울의 포도주를 마시고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영신수련 제1주간이 끝나갈 무렵 이냐시오는 파브르를 방문했다. 이냐시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는 6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불을 지피기 위해 남겨 둔 장작더미 위에서 셔츠만 입은 채 잠을 자고 작은 마당에서 눈을 맞으며 묵상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냐시오는 파브르와 대화를 나눈 뒤 “하루 더 단식하라”고 충고했다. 그러고 나서 “음식을 먹고 불을 피우라”고 했다. 이냐시오는 그 다음 날 그를 위해 장작과 음식을 가득 들고 왔다. 그리고 파브르를 위해 불을 피우고 요리를 했다. 말년에 이냐시오는 “초기 예수회원 중에서 파브르처럼 영신수련을 잘 지도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종종 이야기했다.
 

파브르는 1534년 2월 28일 부제품 후보로 추천됐고, 그해 부활 성야에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0일 파리의 장 뒤 벨레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달이 지난 1534년 7월 22일 파브르는 첫 미사를 드렸다. 그날은 파브르의 수호성인이자 모든 죄인의 수호성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이었다.
 

1534년 9월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서거하고 바오로 3세 교황이 새롭게 선출됐다. 1521년 루터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이후 교회는 분열과 갈등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시에 교회 분열과 갈등은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복잡하게 얽혔다. 이러한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공의회 소집 요청이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과 화해하고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재임 때 이런 공의회에 대한 요구가 많았지만, 당시에 교황은 공의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무시했다. 교황의 거부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기도 했고,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와 바젤 공의회(1431~1447)에 대한 기억 및 교황권과 공의회 권위를 둘러싼 논란의 증가 때문이기도 했다. 교황이 정치적 개입으로 스스로 두려움과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오로 3세 교황은 달랐다. 그는 즉위하면서부터 열렬하게 공의회 개최를 지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했다. 바오로 3세 교황이 즉위한 1534년부터 공의회가 시작된 1545년까지는 예수회와 파브르 신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529년 파리 생트 바르브대학 기숙사에서 방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한 예수회의 초기 동료들은 마침내 1540년 9월 27일 바오로 3세 교황에게 예수회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파브르는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아 가는 길에 생을 마감했다.
 

바오로 3세 교황은 1539년 여름 파르마 공국에서 모범적인 사제 몇 명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베드로 파브르와 디에고 라이네스 신부를 파견했다. 파브르 신부에게는 첫 사명이었다. 그러나 파브르는 154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럽의 여러 지역을 계속 여행하며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돌보고, 교회를 떠난 영혼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도록 도왔다. 또 그는 루터교도들과 다시 일치를 이루며 동시에 여러 지역에 예수회 공동체의 초석을 닦기 위해 열정적으로 온 힘을 다했다. 몇 년 동안 그가 걸어서 여행한 길은 수천㎞다. 그래서 그는 ‘길 위의 수도자’라고도 불린다.
 

파브르 신부는 첫 사명지인 파르마 공국에서 주일과 축일 때마다 설교하였지만, 신자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1년이 좀 지나서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왔다. 당시 설교를 라틴어로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회심하게 된 이유는 설교보다는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타고난 부드러움과 친절함, 다른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자세, 교양과 연민 덕분에 그는 파르마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파브르 신부의 고해소에는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며 겸손과 탕자의 눈물로 하느님 앞에 회개하려는 파르마 사람들로 넘쳐 났다.
 

4년 뒤에 파브르 신부는 고해를 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 쾰른에 있는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마지막 문단은 고해 사제의 역할에 관해 그가 생각한 핵심 내용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의 도움은 그것을 얻고자 기도하는 사람에게 쉽게 주어집니다. 고해를 들을 때는 온화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비록 고해자가 무례하더라도 결코 날카롭게 이야기하거나 혐오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이 숭고하고 거룩한 임무를 지겨운 듯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유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우리에게 다가와서 기꺼이 무릎을 꿇은 채 유익함의 근원인 고해를 하러 온 죄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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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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