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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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71) 15세기 ⑥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비판적 문헌 연구로 올바른 가르침 끌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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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훈련’은 지성을 강조하던 사변적인 영성신학에서 의지를 강조하는 실천적인 영성신학으로 전환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근세 르네상스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도 주의주의(主意主義)를 강조했습니다. 인간 중심적이고 이교적인 인문주의는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인상을 주었는데, 특히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은 훗날 종교개혁의 기폭제로 비쳤습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윤리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인문주의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가 출현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성경 본문을 비교 분석해 비판적으로 연구한 발라

이탈리아 로마 출신이었던 로렌조 발라(Loren zo Valla, 1407~1457)는 이탈리아 1세대 인문주의자들의 뒤를 잇는 2세대 인문주의자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 중에 탁월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친 발라는 수사학자이자 문법학자로서 1429~1433년 이탈리아 파비아(Pavia) 대학교에서 웅변법을 가르쳤으며, 1431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또한, 발라는 1437년 아라곤(Aragn)의 왕 알폰소 5세(Alfonso V, 재위 1416~1458)의 비서가 되었으며, 1448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PP. V, 재임 1447~1455)의 비서로 임명되었습니다.

발라는 고전의 원문을 대조하고 비평하며 문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을 계발해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시작했으며, 인문주의를 신학의 범주 안으로 들여오는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발라는 1440년 논문 「콘스탄티누스의 위조된 증여문서에 대한 선언(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에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그리스도교에 정치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교황 실베스테르 1세(Sylvester I, 재임 314~335)에게 작성해 준 증여문서가 8세기경 프랑크 왕국에서 조작된 거짓 문서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 재임 1431~1447)와 대립하는 모양새가 되기도 했습니다.

발라는 언어학자로서 1444년 저서 「라틴어의 우아함(Elegantiarum Latinae Linguae)」을 통해 로마 전성기 시대에 사용했던 라틴어의 문체와 용례 및 문법을 연구, 소개했습니다. 발라의 견해에 따르면, 언어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시대에 쓰인 여러 작품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편 발라는 저서 「신약성경 주석(Ad Notationes in Novum Testamentum)」에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그리스어 원본 성경과 비교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특히 발라는 그리스어 원본과 비교해 라틴어 역본에 심각한 오역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수정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문헌연구라는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비판하는 방법론을 사용함으로써 발라는 인문주의자로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이러한 발라를 등용해 인문주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교황의 도움 속에서 발라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와 이교 인문주의를 가리지 않고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피해를 입히던 인문주의는 차차 그리스도교의 학문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기도와 지식으로 훈련하는 그리스도교 내적 생활을 제시한 에라스무스

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이었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손꼽혔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475년부터 데벤테르(Deventer)에서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했던 문법학교를 다니며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통해 인문학을 접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 에라스무스는 독일 지역에서 유명했던 인문주의자들을 만나면서 고전 연구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1487년 스테인(Steyn)에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수도회에 입회했던 에라스무스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원하는 만큼 그리스도교와 이교 고전을 읽고 연구하면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세상의 경멸에 대하여(De Contemptu Mundi)」와 「야만인들에 대하여(Antibarbari)」를 저술했습니다.

1492년 캉브레(Cambrai) 교구장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고 1495년부터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에라스무스는 프랑스 및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라틴 고전 세속 문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며, 인문학적 지식을 담은 「격언집(Adagio)」을 저술했습니다. 또 1499년부터 영국을 방문해 영국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그리스어에 관심을 가졌던 에라스무스는 1509년 사회와 교회를 비판적으로 풍자한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저술했습니다. 그런데 1517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 조항을 지지했던 에라스무스는 1520년엔 루터의 저서를 반박하고자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504년 루뱅 근처 도서관에서 발라의 저서 「신약성경 주석」를 접하고 문헌비평 방법론을 연구했던 에라스무스는 1516년 직접 불가타 역본을 보완하고 주석한 「신약성경(Novum Testamentum)」을 출간해 교황 레오 10세(Leo PP. X, 재임 1513~1521)에게 헌정했습니다. 또한, 1517~1524년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바오로의 몇몇 서간들을 해설한 「의역(Paraphrase)」을 출간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1501년 남편의 영성생활 발전에 도움을 달라는 어떤 군인의 아내가 한 부탁을 받고 저서 「그리스도교 군인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도와 지식의 두 무기를 가지고 세상 욕망을 어떻게 거슬러 싸워야 하는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먼저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훈련의 연속이라고 언급하면서 무지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지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편이 훨씬 좋으므로 문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이면에 담긴 의미도 찾으면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자신 안에 있는 악습을 알아야 개선할 수 있으므로 참 지혜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무분별, 정욕, 약함 등의 악습을 없애는 내적 쇄신이 중요하므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은 새 신심 운동에서 언급했던 영성생활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문헌 연구는 비판적이기 때문에 언뜻 보면 교회에 해를 입힐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고전 문헌을 비판적으로 연구해서 오히려 올바른 가르침을 끌어냈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달아야 내적 생활에 실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훈련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영성 훈련에서 너무 의지만 강조하지 말고 지성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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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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