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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8) 17세기 ① - 프랑스 영성 학파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마리아를 성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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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 캉펭 작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와 성모’.



17세기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출현으로 혼란을 겪던 유럽 가톨릭교회를 추스르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영성 학파(cole franaise de spiritualit)’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에 중심이 되었으며, 프랑스 영성 학파 신학자들은 체계적인 사제 양성 제도를 설립함으로써 자칫 공허한 메아리가 될 뻔했던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화답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과 마리아 신심을 강조한 베륄

프랑스 북중부 베륄에 인접한 세리(Crilly) 성 출신인 피에르 드 베륄(Pierre de Brulle, 1575~1629)은 파리에서 예수회원들이 운영하는 클레르몽(Clermont) 대학과 소르본느(Sorbonne) 대학에서 공부하고 1599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베륄은 1597년 출판한 첫 작품 「내적 자제에 대한 소론(Bref Discours de l’abnegation interieure)」에서 ‘본질 신비사상’(mysticism of the essence)이 언급한 자기 비움에 관심을 표명하며 중세 말엽에 몇몇 카푸친(Capuchin) 수도자들이 추구한 ‘추상학파’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지위도 포기하고 강생의 신비를 통해 인간이 되셨던 자기 비움의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육화하신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베륄의 신학과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베륄은 친척이었던 아카리 부인(Madame Acarie, 1566~1618)이 1601년에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de vila, 1515~1582)의 환시를 통해 프랑스에 카르멜 수도원 설립을 원하자, 1604년에 스페인 멘발의 카르멜 수녀원을 프랑스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608년에 베륄은 훗날 ‘사랑의 딸회(Filles de la Charit)’와 ‘라자로회(Lazaristes)’를 설립하게 될 뱅상 드 폴(Vincent de Paul, 1581~1660)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베륄은 1611년에 ‘예수의 오라토리오회(Socit de l’Oratoire de Jsus)’라는 사제들로 구성된 사도생활단을 설립했습니다. 프랑스 오라토리오회는 하느님의 본질과 연결된 예수의 인성에 영성생활을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한편 베륄은 저서 「예수의 생애(Vie de Jsus)」에서 강생의 신비의 중심에 자리 잡은 마리아의 역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저서 「경건함에 대한 작품(Oeuvres de pit)」에서도 하느님과 아들 예수 및 마리아가 서로 깊은 관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베륄이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마리아를 성찰함으로써 중세까지 마리아에 국한해서 과도하게 실천했던 마리아 신심은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륄도 저서 「고양(lvations)」에서 강생의 신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고찰하면서, 프랑스 오라토리오회와 프랑스 카르멜 수도회에 그리스도께 종으로서 순명하듯이 마리아에게도 종으로서 순명할 것을 서약하라고 강권함으로써 세상의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베륄은 마리아에게 함께 순명 서약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본받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베륄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적인 영성생활을 실천하려는 프랑스 영성 학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오라토리오회를 통해 신학교 설립을 추진한 콩드랑

프랑스 북부 보뷔인(Vauxbuin) 출신인 샤를 드 콩드랑(Charles de Condren, 1588~1641)은 12세쯤 결정적인 영적 체험을 한 후, 중등학교를 거쳐 소르본느대학에서 공부하고 1614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이듬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콩드랑은 장자 상속권을 포기하고 프랑스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했습니다. 마침 오라토리오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도처에 신학교를 설립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콩드랑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신학교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콩드랑은 베륄의 고해 사제 직무를 담당했으며, 베륄 사후에 오라토리오회 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콩드랑은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온전히 맡기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콩드랑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자기 봉헌은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간격을 매울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이 필요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 합당한 희생제물을 봉헌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쉴피스회를 통해 신학생을 양성하고 예수 성심 신심을 권장한 올리에


파리 출신인 장 자크 올리에(Jean-Jacques Olier, 1608~1657)는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567~1622)에게 격려를 받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소르본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작성한 논문의 성공에 힘입어 로마로 갈 수 있었던 올리에는 그곳에서 실패와 회심을 경험하고 수도회에 입회하려던 중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1631년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올리에는 뱅상 드 폴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선교 사업을 도왔으며, 1633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뱅상 드 폴과 콩드랑의 제자로서 올리에는 그들이 계획하는 신학교 설립 선교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콩드랑의 계획이 실패하자, 1641년 ‘생-쉴피스회(Compagnie des Prtres de Saint-Sulpice)’를 설립한 올리에는 1645년부터 프랑스 전역에 신학교들을 설립해 신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했습니다.

올리에는 프랑스 영성 학파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학풍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육 간에 대립을 언급했던 올리에는 세례성사를 받은 후에도 육체의 성향을 따른다면 죄를 짓고 타락의 상태에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엄격한 극기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올리에는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사제직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한편 올리에도 강생의 신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마리아를 성찰하는 마리아 신심을 강조했으며, 예수 성심 신심 실천도 권장했습니다.



예수와 마리아회를 통해 성모 성심 신심을 권장한 에드

프랑스 북서부 리(Ri) 출신인 에드(Jean Eudes, 1601~1680)는 14세에 개인적으로 정결 서약을 했으며, 캉(Caen)에서 예수회원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1623년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한 에드는 베륄과 콩드랑을 영성생활의 모범으로 삼으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을 배웠습니다. 1625년 사제로 서품된 에드는 잠시 공부를 지속하다가 장상의 허가를 받아 한동안 전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에드는 매춘 여성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1641년 ‘사랑의 성모회(Ordre de Notre-Dame de Charit)’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에드는 신학생과 선교사 양성을 위해 1643년 ‘예수와 마리아회(Congrgation de Jsus et Marie)’를 설립하면서 오라토리오회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에드는 프랑스 영성 학파가 주장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에드는 베륄만큼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고, 보다 실천적인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에드 역시 저서 「그리스도인 영혼들 안에서 예수의 생애와 왕국(La Vie et le Royaume de Jsus dans les Ames Chrtiennes)」에서 예수와 함께 예수를 통해서 출발하는 마리아 신심을 주장했습니다. 즉, 신앙인들은 마리아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며 흠숭해야 하고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공경하고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에드는 성모 성심이라는 개념을 강조했으며 예수와 마리아회를 통해 성모 성심 신심 실천을 권장했습니다.



베륄을 필두로 하는 프랑스 영성 학파 신학자들은 중세에 하느님 중심적인 신학과는 달리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을 마리아 신심에도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학교를 설립해 체계적인 신학생 양성을 시도했던 점은 가톨릭교회와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파리 외방 전교회’(Missions trangres de Paris)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58년 설립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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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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