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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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50) 순례,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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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이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후 사람이 확 달라졌어요?”

“정말이요? 어떻게요?”

“우선 자신감이 생겼고요. 무엇보다 그동안 어디 한 곳에 정착을 못 했는데 지금은 취직해서 직장도 잘 다녀요.”

지인의 남편 H씨는 오랫동안 전문 분야에서 관리직으로 있다가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퇴직하게 되었다. 한동안 방황을 하면서 자신감도 잃고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경제 능력을 잃고 아내만 바라봐야 하니 자존감도 바닥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의 권유로 순례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순례 길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H씨가 순례를 하면서 SNS에 올린 글이다.

“나는 왜 왔을까? 오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백수로 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러 온 것도 아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심을 더 키우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 어떤 바람 없이 그냥 왔다. 게다가 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비행기 표 살 줄 알아? 아니. 유심칩이 뭔지 알아? 몰라. 영어 할 줄 알아? 못해. 외국 음식 이름이나 알아? 전혀. 그래 난 아무것도 못 한다. 게다가 혼자 여행 갈 생각을 하니 엄청 겁이 났다. 그러다가 ‘에라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심정으로 왔을 뿐이다. 그런데 걷다 보니 참 좋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좋다. 계획 없이 그냥 부딪혀도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래.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걸. 왜 나는 여태 억수로 쫄며 살아왔을까. 그리 살면 죽는 줄 알았다.”

나는 H씨의 글을 읽으면서 ‘그래, 순례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야 하겠어?’ 바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용기다. 순례는 외로움을 허하고 아무 바람 없이 욕심을 내려놓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순례자는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챙기지 않는다. 배낭도 하나, 삶의 짐을 덜어내듯 가벼울수록 좋다. 걷다 보면 그동안 움켜쥐었던 욕망의 짐을 덜게 되고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방어하고 싶어 입었던 무거운 갑옷도 벗고 싶어진다. 그렇게 덜어내고 벗다 보면 진짜 참 나의 모습과 가까워진다. 미움받을까 봐 판단 받을까 봐 두려움에 잔뜩 웅크리던 어린아이 ‘에고’와도 거리가 생긴다. 그래서 점점 더 진짜 내가 좋아진다.

순례자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여정 자체가 구원의 시간이다. 그러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나와 열애하는 순례 길, 그냥 내가 좋은데 누굴 만나든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어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H씨는 누구를 만나도 고마웠고 무엇을 먹어도 감사했다. 와인 한잔에 눈물이 났고 배가 고파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어 행복했고 길을 잃고 헤맬 때 굳이 가던 길 돌아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바른길 안내해준 그 사람을 천사라고 믿었다. 무심코 떠오른 성경 구절에 전율을 느꼈고, 우연히 보게 된 무지개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건강하게 걸을 수 있어 감사했고 어디서 잠을 자도 은총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친 H씨는 단 하나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단다. ‘내가 이 길을 걸은 것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걷게 해주셨다’는 것을.

신문사로부터 원고 쓴 지 1년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벌써?’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부담이 컸다. ‘그래, 일 년만 해보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용기를 내고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의 흐름을 까마득히 잊고 원고와 순례의 길을 걸어왔나 보다.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성찰하기

1. 계획해서 이뤄낸 것이 얼마나 있던가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많던가요?

2. 힘든 일이 있을 때,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며 용기를 내요. 진정한 용기는 ‘내려놓음’입니다.

3. 삶의 짐과 갑옷, 타인의 시선과 판단을 고스란히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진짜 나의 참모습이지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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