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신약의 비유<14>가라지 비유와 해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됐음을 비유로 전해, 심판까지 좋은 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 담겨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가라지 비유는 누구에게나 아직 회개의 시간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준비한 이에게 종말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최광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 담당

마태 13,24-30. 36-43



마태오 복음에만 언급되고 있는 가라지의 비유는, 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비유 부분과 비유의 참뜻을 설명하기 위한 해설 부분,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의 군중들에게 먼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며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는 ‘인내’를 강조하신다. 두 번째 부분인 그 해설은 비유를 설명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세상 마지막 날 즉, 종말에 대한 설명을 그 중심 메시지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로 가라지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그 당시 청중들에게 잘 알려졌던 은유들이나 구약성경의 표징 또는 상징들을 잘 활용해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표징들이 이 비유에서 매우 잘 드러나는데, 이는 우화(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가라지 비유에 담긴 다양한 의미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우화적 해석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일곱 가지 범주가 차례차례 제시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명확하고도 충실하게 제시되고 있다. 비유의 해설에 나타난 이 일곱 가지 범주를 살펴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 본인 자신을 드러내며, 밭은 세상을,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을 의미한다.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을,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를,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을, 일꾼들은 천사들을 나타내고 있다. 즉,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모습들과 하느님 나라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선한 행위를 드러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 즉,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 안에서도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하느님 나라에는 기이한 상황 역시 존재한다. 밤에 가라지를 뿌리는 원수가 등장하는 것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행위를 선한 행위로 또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로 생각해 본다면, 밤에 나타난 원수는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 역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세상 안의 하느님 나라이기에,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이기에 악한 자녀들도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피나 독보리라고도 불리는 가라지는 초기 성장 단계에서는 밀과 매우 유사하기에 보통은 끊임없이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농사법이었다. 이에 종들은 관습대로 열의를 가지고 ‘가라지를 걷어내겠다’고 주인의 허락을 청한다. 사실 밀보다 가라지의 뿌리가 더 강하기에 실제로 가라지를 뽑아낼 때에는 어린 밀이 함께 뽑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 사실이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가라지들은 뽑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기쁨을 준비하는 시기

메시아를 고대하며 기다리던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합당한 준비로 순수한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공동체에 합당하지 못한 죄인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비난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표적 집단들로는 바리사이들, 쿰란 공동체를 비롯한 엄격주의자들, 열성당원들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열성당원들은 당장에 밀(유다인)과 가라지(로마인)를 구별하여 가라지를 뽑아내려고(로마인들을 쫓아냄) 조급해 했으며,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도 엄격한 율법에 의해 죄인들과 의인들을 구별해 내는 일에 자주 집착하고 있었다. 엄격한 율법을 충실히 지킬 수 있는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선인으로 여기며, 이를 지킬 수 없는 많은 이들은 죄인으로 단죄하고 있었다. 여기에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을 심판하지도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예수님은 자연히 비판의 대상이 됐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당장의 심판보다는 둘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별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야 함을 말씀하신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이 다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하며 인내의 필요성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다. 더불어 추수를 할 사람들은 종들이 아니라 추수꾼들이 따로 있음을 언급하시며, 우리 자신이 심판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바로 교회 안의 악인들을 심판하고 구별할 사람은 공동체 내의 의인이나 선한 자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임하실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급한 구별이나 단죄, 심판 금지의 말씀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밀에게도 가라지에게도 추수 때까지의 시간은 회개할 가능성이 주어진 시간이며 모두가 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공동체 안에서 악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는 좋은 밀로 성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초대이기도 하다. 가라지의 비유와 그 해설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된 이들임을 설명하며, 이제 종말의 심판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준비하는 시기요,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된 사랑의 시간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4-08-29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3. 29

마르 1장 38절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