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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로또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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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지난주에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나야, 나” “하느님, 저예요, 저!”라는 한마디만으로도 서로 알아차릴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에 덧붙여, 오늘은 청원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난가을, 몇몇 신자분을 만난 자리에서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약간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저는 “이러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너무 기복적인 모습이 아니겠냐”는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대부분 하시는 말씀이,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런 마음일 수 있지만 기도의 여정 안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또 기도가 끝나갈 무렵에는 기복적인 마음보다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던 감사한 경험이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분께서는 약간은 볼멘소리로 이런 말씀도 하셨죠. “그런 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해서 부정적인 것으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어떤 것은 청해도 되고 어떤 것은 청하면 안 되는 기준이 무엇이냐, 결국 우리 신앙이 기복 신앙에서 출발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은 맞는 말씀이다 싶습니다. ‘기복’이라는 말 자체가 ‘복을 비는 것’을 의미한다면, 누구보다 더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기를 원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 또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도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억압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라는 사명을 모세에게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 속에서 자신들을 구해주시길 청하는 것이 그들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첫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온전한 기복 신앙이라고 하기엔 뭔가 개운치 않은 것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어떤 것을 청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 청해도 되는 것과 청하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다못해, ‘하느님, 이번에는 꼭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가 우선 드리고 싶은 답은,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는 기도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우리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런데 이 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처음 한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웃거나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축축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울어 젖히죠. 그럼 엄마 아빠가 다가가 무엇 때문에 그런지 살펴보고 아기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런데 이런 아기를 두고서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 엄마 아빠한테 의지하지만 말고 너도 좀 알아서 해보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겠지요. 그만큼 어린 아기는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모든 것을 엄마 아빠에게 청하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는 어떻게 될까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다가 어느 해 어버이날에는 커다란 도화지에 카네이션을 그려옵니다. 그리고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삐뚤빼뚤 글도 적어오지요. 그 의미를 온전히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녀로서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삶의 대부분을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더 자라서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될수록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일들이 조금씩 더 많아지고, 때론 집안일이나 부모님 일도 도와드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점점 더 커지게 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께 많은 것을 의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월급을 타게 되면 부모님께 빨간 내의를 선물해 드리고, 비로소 보다 독립된 삶을 살기 시작하죠. 그리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첫아이를 낳게 되면, 그때서야 부모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길러주셨는지 체감하게 되고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더 온전히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는 연로해져 가는 부모님을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인간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부모님께 많은 것을 의존하는 어린아이의 시기에서 사랑과 공경의 마음으로 부모님을 모시는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우리 신앙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어른의 신앙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시죠.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1코린 3,1-2)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가지만, 그 신앙의 정도가 모두 같지 않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을 때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성숙한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은총을 우리는 견진성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성숙 정도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놓고 볼 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이라면 아까 말씀드린 ‘로또 당첨’과 같은 청원 기도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지 못할 청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청만 하느님께 드린다면 그것도 썩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부모에게 의지만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우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께 청하세요. 사소한 것, 자잘한 것, 이기적인 것까지도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그것으로도 좋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키워내듯 하느님께서 우리를 키워주실 테니까요.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수록, 청원의 내용도 나 중심에서 너 중심의 내용으로 자연스레 바뀌어나갈 테니까요.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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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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