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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아름답고도 완전한 소멸 / 사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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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아픔, 상실, 죽음…. 누구나 무의식에서조차 그에 대한 공포로 조급함과 불안함을 갖게 되는 그런 단어들입니다. 성주간을 한 주 앞두고 오늘 복음과 독서의 본문들은, 이런 수난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육신적으로 용맹하게 고통과 싸우고 그게 안 되면 정신력으로라도 이겨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들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수난의 시간을 감내하는 가치야말로 십자가와 죽음을 극복하는 길임을 가르쳐줍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유명한 비유를 통해, ‘영광의 시간’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됨을 명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포기한 밀알처럼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의 진정한 운명과 기능이 가동됩니다. 즉 존재는 소멸을 온전히 각오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 복음 본문의 맥락

요한복음의 본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전반부(1,19-12,50)는 예수님의 기적과 경이로운 행적들, 즉 ‘표징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므로 ‘표징의 책’이라 하고 후반부(13,1-21,25)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왜 영광과 구원이 되는지를 설명하기에 ‘영광의 책’으로 불립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리스인들에게(12,21-22) ‘영광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23절)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 선언하며 시작되는데(2,4) 이제는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음’을 알리며 후반부 ‘영광의 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소멸을 통해 완성되는 영광

요한복음에 의하면 ‘영광’을 받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는 사순 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영원한 생명(부활)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주어질 수 없고, 영광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일을 감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의 시간에 앞서 마주한 극도의 수난과 모욕을 감추거나 은닉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바로 이때를 위해 온 것”(12,27)임을 강조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연의 섭리 하나를 예로 드는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24절)으로 시작되는 비유입니다.

27절부터는 분위기가 전환됩니다.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는 ‘타락소’이며 무엇인가를 휘저어놓는(마치 물이 담긴 유리컵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려 휘저어놓는) 행위를 말합니다. 극도의 교란과 갈등 속에 흔들리는 상태를 묘사하며 깊은 두려움과 의혹에 휩싸여 있는 예수님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충분히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구분하여 실행하는 은총을 말합니다. 고통은 두려움과 혼란을 초래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게 함으로써 가장 진정한 내면의 힘을 만나게 해주는 영광 이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번민하시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내리십니다.(28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가 단지 피흘림의 ‘외적 제사’로만 올려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내적-영적 제사’의 결과이기도 했음을 알려줍니다.



■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제2독서(히브 5,7-9)는 예수님의 내적-영적 제사를 매우 드라마틱한 서사로 묘사합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극도의 고통 중에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시는데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심으로써(5,7) 내면에 존재하는 갈등과 번뇌,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에게도 수난과 죽음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진정한 믿음으로 봉헌하시는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하는 법을 배우신”(5,8) 다음 비로소 “완전하게 되시는”(5,9) 여정을 거치십니다. 이는 순명이 단순히 외적 규범의 의무적 실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그 본질로 하는 거룩한 행위이며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긴밀한 사건임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 모든 이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길이 열리고 예수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5,9)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에 의해 예고된 “새로운 계약”의 실현이 됩니다.


■ 어떤 상황에서도 잊혀질 수 없도록, 마음에 새긴

제1독서(예레 31,31-34)에서 말한 새 계약은 이전의 시나이에서 맺었던 옛 계약과 그 내용을 기록하는 장소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을 더 이상 ‘돌판’에 새기지 않고(신명 5,22) 인간의 ‘마음’에 새기시는데, 옛 계약이 몸 밖의 곳에 새겨진 것이라면 이제 새 계약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마음에 새겨집니다. 성경의 전통에서 ‘마음’은 존재의 가장 깊고 내밀한 장소이며,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고 선택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마음에 새기다’라는 말은 존재 깊은 곳에 새겨져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울 수 없고 망각하거나 외면할 수 없이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단순한 조약체결의 성격을 넘어서서 아주 내밀하고 직접적인 유착에서 가동된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31,34)고 선언하십니다. 즉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상황을 의미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새 계약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이 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내 안에 영원히 존속하게 하는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새 계약은 하느님의 현존이 내 존재 깊은 곳에 새겨져 도저히 잊힐 수 없는 힘으로 작동되는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 곧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삶은 언제나 이중의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선택되든지 버려지든지…. 성경이 가르쳐주는 확실한 ‘영광의 길’은 실패하거나 버려지더라도,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에 성실하고 그에 따르는 십자가를 묵묵히 감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가혹하기도 하지만 너무도 간절해서 누구도 훼손하지 못하는 존엄의 여정을 걸을 때 인간은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의연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교회 안팎의 여러 사건들로 소란스러운 지금, 오히려 진정성 있는 삶을 위한 상실과 소멸을 감수할 때 새 계약의 희망도 성큼 우리 마음에 새겨질 수 있습니다. 완전한 소멸이나 상실을 통해 마침표를 찍어야만 비로소 다가오는 새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지만 소멸을 감수하려는 결단, 성경이 가르쳐주는 위대하고도 존귀한 영광의 길입니다.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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