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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짧은 만남, 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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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겨울의 허름한 시골 터미널, 아내와 아이들을 태운 서울행 시외버스가 “부웅” 소리를 내며 터미널을 빠져 나갔습니다. 귀엽고 작은 손을 열심히 흔들어 주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아내는 눈맞춤을 애써 외면하며 차창 밖만 응시했습니다. 아마도 군인의 아내로 산다는 것,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등 복잡한 심경 때문이었겠지요.

맞벌이를 하던 아내와 토요일 저녁 늦은 때에 겨우 만나 일요일 점심을 서둘러 챙긴 후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또 얼마를 기다려야 만날 수 있을까를 가늠하면서…. 수없이 만났다가 헤어지며, 이력이 날 만도 했건만 시야에서 사라진 버스 속의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은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멍울이 됐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책을 잡았으나 책장은 멈춰 있고, TV로 마음을 옮기려 해도 눈에 들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옷을 챙겨 입고 싸늘한 강바람이 부는 홍천강변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한기가 스며들 때쯤 언제나처럼 발길은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입안에 머금으며 다음주 예정된 업무를 훑었습니다.

한 주간의 업무를 체크하고 미리 할 수 있는 것들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일을 시작하자, 손끝은 빨라졌고 부산한 일상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샘물처럼 솟았습니다. 미친 것처럼 몇 시간을 몰입한 결과, 다음주 중요한 업무들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반나절 먼저 일과를 시작한 셈이니, 주중에는 여유 있고 차분하게 일상적인 업무를 빈틈없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오히려 업무의 성과를 높이고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서글픈 가운데 위안이 됐었지요.

‘짧은 만남, 긴 이별’을 잘 견뎌내고 돌아온 지금, 처절하고 지독하게 보낸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살아갑니다. 현역시절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단란한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아내와 마음껏(?) 손을 잡고 미사에 참례합니다. 또한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못했던 친지들의 애경사에도 아내를 대동하고 얼굴을 내밀었고, 정을 나누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정담을 나누는 호사를 누립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긴 이별로 외로움과 싸우며 일벌레처럼 지새웠던 날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행복이 밀려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라며 문득 두려움이 들기도 합니다.

석복수행(惜福修行)이라 했던가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행복! 깨지지 않도록 보석처럼 아끼며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긴 만남, 짧은 이별’의 그날까지요.


이연세 (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 동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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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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