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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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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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앙 선조들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며 지금의 자리를 매무시하는 날입니다. 말씀묵상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로 출발하겠습니다.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세 가지 조건은 명료하면서도 단호합니다. “버리고” “지고” “따라야” 하는 선택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선 단어의 속뜻을 헤아리면서 지금 나의 자리를 매무시해 볼까요?

“버리고”는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다’, 곧 자기부인, 자기거절의 속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지요. 여기서 자신의 뜻이란 거짓자아, 원래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기 위해서는 비움이 필수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참 행복은 아버지와 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를 낳고 기를 때 그들의 행복을 빌고 빌듯이 천상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내가 그 진실을 믿을 때, 세상으로부터 오는 나의 뜻을 버릴 수 있습니다.

“지고”는 ‘등에 지다’ ‘세우다’ ‘얻다’의 의미입니다. 특히 골고타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세우다’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내 마음의 지평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골고타 언덕에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좌우편에 죄수가 달렸습니다. 좌우편의 죄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왔고 마지막 순간에 처했습니다. 한 편은 예수께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의탁했지만 다른 한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즉 한 쪽은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긍정하였지만 다른 한쪽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동안 예수님은 침묵했습니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선택이 인간에게 놓여져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 자체보다 그것을 짊어질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자신의 십자가를 제대로 알 수 있고 짊어질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참 자아의 완성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야”, 자신의 삶을 통해 증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분 계심을,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내가 그분과 하나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받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안에 있다는, 생명이 있다는 증거니까요.

오늘 복음의 남은 절들은 구원의 완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생명이 지닌 최고의 가치요 절대성입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에 해야 하는 절박한 일입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 생명으로 바꾸어지는 신비요 놀라움입니다(창세 1,27; 2,7; 요한 20,22). 잃어버렸던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고 이제 최고의 가치를 다시 추구하는 삶, 곧 증거하는 삶의 나날이 됩니다. 오늘의 2독서가 그 고백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쓴 자신의 편지에서 이러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힘차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그런데 인간 마음은 자신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길이 있다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을까요? 종종 고민을 털어놓는 신자들에게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질문은 ‘참 그리스도인의 삶, 하느님의 영과 함께 하는 삶, 성령이 나와 함께 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내가 성호경을 그을 때, 사랑할 때, 선을 갈망하고 지향할 때, 지치고 포기했는데 다시 회복하고자 할 때,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이미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35절) 밖에서 법으로 나를 통제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사랑으로 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하여’가 아니라 이미 내재해계시는 분 ‘때문에’가 됩니다. 사랑할 때는 자신을 바라보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를 보고 행복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부터 솟아나는 갈망은 너무나도 강하기에 우리는 더 깊이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내재해계시는 주님께 나를 맞추는 의지적인 선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지향의 일치로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한 몸의 성사적 의미는 단순히 두 몸이 결합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들 간의 친교에 상응하는, 곧 선포된 신비가 믿는 이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말합니다. 감추어져 있는 신비가 신앙에 의해 인간에게 실현됨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은 신앙은 단순히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멋있게 하는 것에만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빛이 되어 나의 전부를 세상에 찬란히 드러냅니다. 그 빛은 생명이고 그 생명의 피가 나의 삶 전반에 힘과 능력을 주고 있습니다.

어렵나요?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지킬 수 있습니다. 선물은 선물을 준 이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선물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준 이도 함께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지요.

영원한 신비가 신앙의 장막 아래서 작용하지만, 신앙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선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영원한 신비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2코린 3,18) 변모되는 여정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받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점점 더 하느님을 닮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모든 이들의 몸에 새겨진 영원한 신비를 더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신앙 선조들이 그 유산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나게 살아야겠습니다!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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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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