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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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잘 안다는 것, 주저 없이 알아듣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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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관계를 맺는 행위라기보다 알아보는 행위이다.” 프랑스의 신경정신의학자이며 비교행동학자인 보리스 시륄니크가 정의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알아보게 하고 온전히 알게 하며 신뢰하고 따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소 주일이며 ‘착한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4주간의 본문들은, 서로를 알고 그 목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들으며 그 어떤 난관 중에도 그를 믿고 따르는 ‘목자와 양떼’에 대하여 전합니다. 특별히 복음의 본문은 예수님과 그분의 양떼 사이에 형성된 이 관계가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고 그 마지막까지 주도됨을 알려줍니다. 인간은 낯섦에 대하여 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타자적 존재를 그 어떤 두려움 없이 온전히 믿고 그 목소리를 주저 없이 알아들으며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관계는 하느님만이 허락하시고 계획하시며 가꾸어 가시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전봉헌 축제(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혁명군이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를 격퇴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탈환하여 정화하고 봉헌한 사건 기념)를 그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요한 10,22 참조) 유다인들의 큰 축제 중 하나인 이 시기에 군중들은 예수님이 오셔야 할 메시아인지를 질문합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이스라엘의 자부심이었던 다윗의 영광과 마카베오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성공을 전제로, 예수님도 그렇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위업을 이룩해주실 수 있는 분인지를 노골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듯한 헌신과 사랑이 당신의 사명이며 영광임을 강조하여 알려 주십니다.


■ 양들을 잘 아는 목자

목자와 양떼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유비’(類比)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이고 그분의 것이기에 그분을 따라야 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의 소리를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예수님의 양들은 그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또한 목자도 양들의 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이러한 상호성은 언제나 목자와 양들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난히도 ‘안다’라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기노스코’에 해당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알고 배우는 인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가 갖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섬세하게 알아주고 이를 실현시키는 헌신적인 행위, 돌봄, 확신… 등 사랑이 주는 모든 정서를 내포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내용들도 이 ‘앎’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28절)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살리는 것이며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안전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목숨을 당신의 양들을 위해 내어놓으셨고 그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 사랑의 중요한 단서 하나가 제시됩니다. 이 관계가 여타의 인간관계와 명백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그분에 의해 계획되며 인도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29절)라고 이 관계의 근원을 분명히 표명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에 의해 주도된 관계는 절대적이고 견고하며 놀라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반대로, 제1독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거주하던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명망 있는 인사들을 안식일에 초대하여 회당에서 연설을 듣는 관습이 있었는데 본문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말을 듣기 위하여 “거의 다 모여 들었다”(사도 13,44)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자 모여드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44절) 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46절) 판단한 것이라고 보고 다른 민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겠다는 담대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자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됩니다.(48절)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형성되는 것입니다.


■ 어린양이시며 목자이신 분

제2독서인 묵시록의 내용도 “하느님의 백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연상시키는데(창세 22,17 참조)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를 형성하고 있고, 국가나 민족의 구별 없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온 이들로서 광대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던 구원의 범주가 이제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한 이들인데(14절)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죄에서 벗어나 깨끗한 상태로 건너가게 하였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희생과 봉헌은 예수님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 되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17절)십니다. “어린양”은 이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서슬 시퍼런 분노와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일궈낸 안정이라 하더라도 그 정치적 현실이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의 축재와 성공을 통해 살기에 가장 편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이 비인간화와 결핍의 허기를 무력화시키지 못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정치·경제적으로 구원할 제왕적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 어떤 영화나 화려함도 인간이 구현해야 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복과 충만, 자유와 해방을 주지 못함을 깨달으면서 진정한 구원의 실체를 묻기 시작합니다. 그 답은 존재를 바쳐 믿고 보호하며 이끌어주는 목자적 메시아의 등장이었습니다.

부질없는 저항이나 집요한 탐욕에 대한 추구는 현재를 더욱 불안하고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건네주시는 주변의 작은 사랑과 우정을 알아보고 그 빛이 인도하는 복음을 향해 걸어갈 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누릴 온전한 기쁨과 충만은 완성됩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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