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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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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호연지기(浩然之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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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浩然之氣). 천지간에 넓게 퍼진 올바른 기운이라는 뜻이다. 시작은 작은 샘물처럼 미약하다. 그러나 7월의 장마처럼 일순간 거대한 홍수를 일으키고는 어느새 말라버리는 그런 물줄기는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의 샘은 땅 속 깊은 물골에서 길러져 멈추지 않는 것.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지만 그것이 냇가를 이루고 강을 이뤄 마지막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생명의 위대함이다.

호연지기는 그래서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매시매초 자신 안의 하느님께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은총의 기적이다. 맹자는 이를 하늘로부터 받은 ‘의로움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쌓아가는(집의(集義))’ 행위를 통해 몸에 익숙해지는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그 사람은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부동심(不動心)이다. 누가 뭐라 하든 제 멋대로 하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제 몸으로 살아내서 스스로 욕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결같은 마음, 일심(一心)이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말라 3,20)

오늘 제1독서 말씀이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제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욕심이 채워지면 우쭐하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울해 한다. 도무지 제 인생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오늘 독서의 말라키아의 말처럼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될 것”이다. 짚단에 불이 붙듯, 자기만족의 화염에 열광하다 일순간 타다 남은 재로 끝나는 인생이다. 뿌리가 약하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바로 ‘너희들’은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게’된다. 경외(敬畏)란 공경하여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 자들이 하느님께 의탁하는 거룩한 마음이다.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이 어찌 한가할 수 있겠는가. 자연히 자신을 살핌에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경외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질서 지운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2테살 3,7) 그래서 바오로는 수고와 고생을 하고 밤낮으로 일하며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보여준 것이다. 하느님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질서지우는 것. 이것이 바로 예(禮)다. 우리는 흔히 예를 형식적인 절차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예란 하느님의 소리를 자신의 질서 있는 삶을 통해 표현해 내는 행위다.


주자(朱子)는 그래서 예를 ‘하느님 뜻을 질서 있게 풀어놓은 무늬(천리지절문(天理之節文))’라고 표현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자연 만물을 통해 언제나 드러나고 또 우리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위대함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응답과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해 낼 때 그 위대함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 표현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 한순간 사랑하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하고 적절할 때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무늬를 이뤄 예를 갖추는, 그렇게 그 사람을 존중하면서 사랑할 때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仁)이 마땅한 방식(義)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예(禮)다.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2테살 3,11)은 누군가의 삶에 개입해 조정하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자신 스스로도 질서가 이뤄지지 않아 인생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제단하고 참견하는 것만큼 무례한 것이 또 있을까. 우선 자기 자신이 세워진 다음, 자신의 삶이 질서 지워진 다음에야 우리는 사랑의 준비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질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표현 방식을 찾게 된다. 교회의 여러 전례들과 예식들은 이러한 사랑과 질서를 표현해낸 것이다. 질서 있는 예식을 통해 우리는 외적인 우아함뿐 아니라 우리 안에 샘솟는 하느님의 기운을 지속적으로 끌어낸다. 이것이 몸에 배면 온 몸에서 그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연지기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단한 듯 여겨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라고 호언장담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인물군들의 행태다. 오랜 기간의 인내와 실천 없이 그 때 그 때의 정세만을 보고 갑론을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전의 의미를 깊이 통찰하지 않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루카 21,5)는 따위의 외적인 모습에 천착한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루카 21,6)이라고 경고하신다. 내면에서 울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의 허무함이다.

아름다운 성전의 외적인 형태에만 감탄한다면 쓰러져 간 잔재 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나 초라한 최후에 대한 슬픔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큰 지진과 전염병, 하늘에서의 무서운 일들과 표징에 앞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대어 박해한다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이유다. 모든 재앙들을 하느님 탓으로 돌린 자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럼에도 하느님 편에 있는 자들에 대한 비난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 그런 하느님을 원망하라! 수 세기 동안 신앙의 반대편에서 무신론을 주장하던 자들이 외치던 구호다. 형제자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세속의 흥망성쇠에도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매일의 삶에서 믿음에 근거한 의로움을 실천할 때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그 때 우리의 믿음은 넓게 퍼져 나갈 것이고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 혹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호연지기이며 부동심이다. 오늘 복음 마지막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11-12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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