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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영성 이야기] (1) 기다리고 존중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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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일찍 퇴근해서 가족들과 밥을 먹게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달려와 안기는 둘째, 셋째와 달리, 사춘기 첫째는 식탁에서 서로 마주할 때까지 무뚝뚝했다. 얼마 전 학원을 고급반으로 옮긴 터라 숙제가 많아졌는데, 밤늦게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말을 꺼냈다. 숙제가 많지 않은지, 할 만한지, 잠이 적어 피곤하지 않은지. 그러다가 휴대전화 사용을 더 줄이고 숙제에 더 집중했으면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번졌다. 이전까지 최소한의 고개 끄덕임과 ‘어, 아니’라는 말로 의사소통을 하던 첫째는 아무 말이 없어졌고, 급기야 남은 밥을 한입에 쑤셔 넣고 자리를 떠버렸다. 자기는 공부 못하는 아이가 돼도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속이 상했다. 가족들과 즐겁게 식사하려는 순수한 마음과 아이에 대한 걱정과 관심에서 시작된 저녁 식사 대화였는데, 그것을 몰라주고 매몰차게 거부당한 것이 야속했다. 맨날 늦게 자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해서 친구들과 문자 좀 줄이고 숙제에 집중하면 더 일찍 잠자리에 들 것 같아 꺼낸 이야기였는데, 아빠의 진심이 거절당했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 연민 때문에 시작된 저녁식사 대화는 아이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로 끝이 났다. 하느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나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거치더니 급기야 미움과 분노 같은 악마의 마음으로 종결되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내 하루를 성찰하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그 일에 집중하여 내 생각과 마음을 돌아보았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아이가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음을 보게 되었다. 아이가 왜 늦게까지 친구들과 문자를 하는지 이해하지 않은 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드니까 그것을 그만둬야 한다고 먼저 판단하고, 해결책을 찾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나의 행동에 아이는 아이대로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큰애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미안함이 올라왔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는데, 나는 사랑하는 아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주고 강요하려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사랑에는 무엇보다 기다림과 존중, 적절한 거리 두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아울러 사랑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더 주는 것이라기보다 상대에 대한 내 욕심을 더는 것임도 느끼게 되었다.

사춘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나에게 부모로서 사랑에 대한 도전이다. 이전까지는 베푸는 사랑을 온전히 수용해 주는 아이였다면, 이제는 이렇게 해도 과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줄지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정말 필요한 사랑도 품기 어려운 존재를 가슴으로 품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랑이다. 사춘기 아이와 함께하는 이 시간도 근본적으로 아이에 대한 사랑을 담금질하고 순도를 높여가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초대하시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사랑이 많은 하느님이라 해도 인간이 다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하실까. 그러지 않음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칼에 단죄하지 않으시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인간에게 상처받고 버림받는 체험을 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과 연민을 멈추지 않으시고 기다림과 존중의 마음으로 인간들을 계속 품고 가신다. 당신 자신이 그렇게 하시면서 너희들도 아이를 키우는 것을 통해 내 사랑을 조금이나마 배워갔으면 한다고 하시는 것 같다.


‘선인장’(에피톤 프로젝트)이라는 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물은 모자란 듯하게만 주고/ 차가운 모습에 무심해 보이고/ 가시가 돋아서 어둡게 보여도/ 걱정하지 마/ 이내 예쁜 꽃을 피울 테니까.” 앞으로 아이에 대한 걱정과 개입은 좀 더 줄이고, 아이를 더 이해하고자 애쓰고, 아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더 가지도록 애써야겠다. 그러면 내 마음도 한결 더 편해지고, 아이도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에너지 정책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환경부 산하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녹색기술센터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며, 한국CLC에서 교육기획팀장을 맡고 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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