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교구/주교회의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말씀묵상] 빛과 소금의 방식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왠지 저항하거나 거역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빛을 담고 있는 얼굴, 환한 햇살 같은 미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온화함…. 오늘 복음은 그런 ‘빛’을 머금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고 간직해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구현해온 사람에게서 발현되는 삶의 거룩한 열매가 바로 그러한 ‘빛’이고 그 빛으로 생산된 삶의 분말들이 ‘소금’입니다.


■ 복음의 맥락

연중 4주간에 이어서 연중 5주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교훈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무엇이 진정하고 참된 행복인지를 여덟 가지로 정리하여 알려주신 연중 4주일 본문(올해에는 ‘주님봉헌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다른 본문을 읽었지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애쓴다면…(마태 5,3-12 참조),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이미지는, 제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개발 지침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구체적으로 해주어야 하는지 철저히 타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랑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맛있게 하고 사물을 밝혀주기 위해서 스스로는 소멸되어야 하고, 그 소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 방식,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묵묵히 간직하고 걸어가야 할 삶의 지고한 신념입니다.

■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빛과 소금’이라는 두 개의 상징적 은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역할을 설명해주십니다. 소금은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입니다. 정상적 생활을 하는 가정이라면 소금 없는 집이 없을 것이고 인간의 신체에도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빛’입니다. 빛은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물이고, 따라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빛’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은유를 제시하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이며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15절)로 설명하신 부분입니다. 생소하고 외딴 길을 갈 때, 저 멀리 불빛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면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고마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집 안에서도 등불이 등경 위에 있을 때 주변 전체를 볼 수 있어 일상이 아무 충돌 없이 진행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고 등경 위에 올려진 빛이기에 모두에게 가시적으로 공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16절) 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빛이 되려면

제1독서는 세상의 빛이 되는 방식을 정확히 제시해줍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7)입니다.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기본권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요구는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어줌을 통해서 가능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9-10절)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10절)


■ 하느님의 힘

바오로 역시 자신의 연설이나 활동이 하나의 ‘의견’ 혹은 ‘사회적 담론’에 머무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1코린 2,5)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모든 활동이 인간의 언변이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힘”(5절)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4절)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활동했던 헬레니즘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추종하고 찬양했던 ‘지혜’(소피아)를 배격하고 ‘하느님의 힘’을 강조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맺음을 통해, 그러한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짐을 당당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생활 안에서 크고 작은 혁명을 주도한다고 해서 공동선과 구원이 쉽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조직과 사회적 연대로 인간의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고 구현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복지적 협약 이후에도 여전히 도래하는 갈등과 모순, 파괴와 소외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구체적 노력과 정성이 실종된 채, 공동선이라는 이념만으로 미화된 사회적 제도들은 인간의 품격과 존엄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이기주의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미화된 가식과 위선으로는 결코 인간을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변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산위의 고을이나 등경 위의 빛처럼 드러내 보이는 이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왜곡되지 않게 보존하고(소금) 밝히 드러나게 하여(빛) 인류가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이러한 진리의 증거는 온전히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을 빛나게 할 때 비로소 나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빛과 소금의 방식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2-04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4

에스 4장 17절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주님의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