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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ㆍ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7. 덕원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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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중국에서 이주해온 한국 가정 출신 신학생 14명으로 서울에서 시작한 원산대목구 소신학교는 1927년 11월 덕원에서 새 학기를 시작한다. 1929년 대신학교가 병설되면서 원산대목구 소신학교는 `덕원신학교`로 불리게 된다.
 
 이전 당시 수도원과 신학교 건물은 다 지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200m가량 떨어진 신학교 건물 공사는 수도원 신축공사와 동시에 시작됐는데, 학교건물 형태는 2층 규모의 중앙 건물과 2개의 날개 건물로 이뤄진 H자 형이었다. 공사는 1928년 봄에 재개돼 그해 가을에야 완공됐다. 공사비용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주선으로 네덜란드 `성 베드로 사업 기금`에서 원조를 받아 충당했는데, 절반은 희사, 절반은 상환이었다. 건축기금 기부자를 기리고자 하는 뜻으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리슬란트 사람들의 사도` 성 빌리브로르도(658~739년)를 신학교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신학생들은 주로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 출신으로, 평양지목구에서도 일부 신학생을 보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서울과 대구대목구, 전주지목구 등지에서도 신학생들이 왔으며,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에는 신학생 수가 111명에 달했을 정도다. 현재의 신학교들과 비교해도 그리 작지 않은 규모다. 초기엔 신학교 지원자가 적어 2년에 한 번씩 신입생들을 받았지만 1941년부터는 해마다 신학생을 선발했다. 교육과정은 중등과 5년에 고등과 2년,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 등 총 13년이었다. 매 학년은 9월 초에 시작해 이듬해 7월 초에 끝났다. 학과 공부 외엔 음악교육을 중시했는데, 이는 전례를 중시하는 베네딕도회원들의 의식 때문으로 보인다. 여가 시간엔 낚시도 즐겼고, 1936년엔 종교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림은 1938년 9월 원인 모를 화재로 신학교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기 이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이다. 신학교 앞에는 오리가 떠다니는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화재로 불탔던 신학교 건물은 당시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들 도움과 네덜란드 보험회사의 보험료 등에 힘입어 1938년 12월에 공사가 마무리됐지만, 전과 같이 아름답지는 못했다고 한다. 1949년 5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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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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