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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ㆍ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9. 함흥교구 원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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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본당의 복음화 여정 63년은 1920년 원산대목구(훗날 함흥교구) 설정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 원산대목구 설정으로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이 본당사목을 맡게 되면서 원산ㆍ내평 등 2개 본당에 불과했던 함경도 복음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1925년 한국에 파견된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의 수도원이 원산성당 인근에 들어섰고, 1922년 3월 4년제 남녀 보통학교인 해성학교가 세워졌으며, 1924년엔 임시 성당이 세워졌다. 또 1937년엔 주교좌성당 신축에 들어가 이듬해 9월 20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현대식 성당을 신축 봉헌한다. 아울러 본당 내 야학과 시약소, 노인과 아동을 위한 교리강습소, 해성유치원도 세워져 복음화의 거점 역할을 했다.

 그림은 1938년 새 성당 신축 이전에 세워졌던 임시 성당이다. 한 건물에 해성학교와 성당이 한꺼번에 입주해 건물 왼쪽은 성당으로, 건물 중앙과 오른쪽은 해성학교로 썼다. 학교 교육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선교가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의 선교 전략이었고, 이같은 선교계획은 멋지게 성공했다. 1921년 에카르트 신부의 초청으로 원산본당에 온 오병주(요셉) 전 숭공학교 교사는 본당 구내에 빈민아동교육을 위한 무료강습소를 개설했고 이를 토대로 이듬해 4년제 보통학교를 세웠다.

 대목구 설정 당시 239명에 불과했던 원산본당 교세는 1927년에 1000명을 넘어섰고, 1939년엔 2000명을 돌파했으며, 해방 3년 전인 1942년에는 2700여 명에 달했다. 이같은 원산본당의 활성화는 교육을 통해 가능했고, 해성학교는 공동체 성장에 보이지 않는 밑거름이 됐다. 학교를 통한 선교사업의 영향은 원산 인근 지역까지 번져나갔다. 해성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함경도, 나아가 연길지역으로까지 이주하면서 교육뿐 아니라 가톨릭 신앙에 대한 관심까지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원산본당 공동체는 1949년 5월 9일 교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와 덕원수도원장 로트 신부 등이 체포된 데 이어 5월 11일 원산본당 주임 담 신부, 보좌 노이기르크 신부 등이 체포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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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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