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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 성지순례] 40. 원산대목구 고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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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로 접어들며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기에 은둔처를 제공한 외딴 산간 지역을 벗어나 도시로 성당을 옮긴다. 원산대목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1920년 대목구 설정과 함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본당 사목을 맡게 될 당시에 이미 원산ㆍ내평본당은 본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1921년 내평본당에 파견된 선교사는 막 중병에서 회복된 카누트 다베르나스(1884∼1950) 신부로, 훗날 6ㆍ25 전쟁 중 만포수용소에서 선종했다. 그는 하느님의 종으로 현재 시복 추진 중인 인물이다.

아무튼 경원선이 고산을 지나고 있었고, 또 고산에서 기관차 차량을 교체했기에 고산역은 점차 번화해졌다. 이에 10여 년간 옹색하고 외딴 마을에 신자라고는 열다섯 가구밖에 없는 내평본당에서 사목하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1930년 도시화되는 고산으로 본당을 옮기고 본당 이름도 고산본당으로 개칭했다.

고산에 새 성당을 지은 인물은 다베르나스 신부 후임자인 플라치도 노이기르크(1894∼1967) 신부다. 수도원의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그는 1935년 고산본당에 부임, 새 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그가 언제 성당 건축을 시작했는지, 설계도는 누가 그렸는지, 누가 그를 도와 성당을 건축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36년 10월 5일자 「덕원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몇 개월 동안 성당 건축 공사를 해온 노이기르크 신부가 과로로 쓰러졌고, 치료차 수도원으로 왔다가 겨우 몸을 추스르자 다시 고산으로 돌아갔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노이기르크 신부는 어쨌든 힘겹게 성당을 신축했고, 옛 성당 자리에는 학교를 세웠다. 당시 고산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는 현지 주민 6000여 명 가운데 600여 명이나 됐다. 성당이 새로 세워지면서 대축일이면 적을 때는 20명, 많을 때는 50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을 만큼 선교가 활발했다.

이처럼 복음화가 진전된 데는 1931년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에서 파견된 수도자들의 활약이 컸다. 고산에 세워진 원산수녀원 첫 분원은 유치원과 시약소을 설립해 사도직을 했고, 채소와 과수를 심어 농원도 만들었으며, 1935년에는 해성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는데, 특히 날마다 이뤄진 방과 후 교리수업이 복음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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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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