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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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민족과 문화는 달라도 신앙 안에 한 형제

과테말라 <4·끝> 김현진 신부(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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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4·끝> 김현진 신부(서울대교구)



처음 과테말라에 왔을 때 한국과 다른 문화에 사뭇 놀랐습니다. 물론 외국이기에 당연히 한국과는 다른 문화일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음에도, 같은 종교 안에서도 다양하게 드러나는 신앙의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영향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모습이 과테말라의 문화와 실생활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5세 생일 기념 미사, 결혼 동전 축복

예를 들어, 과테말라에선 열다섯 살이 되는 여자아이는 열다섯 살 생일 기념 미사를 드립니다. 이 미사를 통해 이제는 아이가 어린 소녀가 아니라 한 가정을 책임지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청하며 올바르게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아무래도 조숙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일찍부터 본인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주는 듯합니다.

또한 십자성호를 그을 때, 마지막으로 본인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댑니다. 이유가 궁금해 많은 사람에게 질문했지만, 그냥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배웠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노인분을 통해 십자성호에 담긴 사연을 들었습니다. 스페인 정복 시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면서 과테말라의 원주민들에게 십자성호를 알려주기 위해 직접 눈앞에 십자가를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성호를 긋게 한 후, 마지막에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십자가를 눈앞에 보여주지 않아도 성호를 그을 수 있게 되니 십자가상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대신,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입술을 대게 된 것입니다.

혼인성사를 드릴 때도 한국과는 다른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하는 혼인 예식에는 반지 축복 이후 특별한 전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전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사제에게 축복받은 동전을 신랑이 신부에게 건네주며, 하느님 축복을 의미하는 재화를 당신과 함께 나누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신부는 다시금 그 동전을 신랑의 상의 주머니에 넣으며, 당신에게 집안의 재화를 상징하는 이 동전을 잘 받았으며, 앞으로 지혜롭게 잘 사용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한 가정을 이루면서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경제적인 부분까지도 함께 서로 나누며 지혜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모습을 통해 삶 깊숙이 담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축복한 것처럼(루카 2,25 참조), 태어난 지 40일이 되면 아기를 성당으로 데려와 미사 후 부모가 사제에게 아기를 건네며 축복을 청합니다. 그러면 저는 갓난아이를 두 팔로 안고 하늘을 향해 번쩍 든 후, 하느님의 축복이 아기에게 함께하시기를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본당 신부에게 열쇠 건네

인사 발령으로 본당을 새롭게 맡게 될 때도 한국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당에 부임했을 때를 되돌아보면, 주교님께서 강론하신 후 저에게 본당의 모든 열쇠를 건네주는 예식을 하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동한다더라도 따로 열쇠를 건네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열쇠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사 중간에 본당의 모든 열쇠를 축복하고 그것들을 사제에게 건네줌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본당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사제에게 맡긴다는 것을 신자들 앞에서 다시금 강조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영성체 역시 다릅니다. 한국과는 달리 성체를 손이 아니라 입으로 모십니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입으로 성체를 직접 드리는 것이 어색해서 조금 낯설었는데, 이제는 저 역시 그러한 전례 안에서 정성껏 주님의 몸을 신자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같은 믿음과 신앙

과테말라에서 살면서 전례나 삶에서 늘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봅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선 전혀 보지 못한 모습이라 낯설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 다양한 문화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에게만 익숙한 틀 안에 예수님을 가두고, 그 틀로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동안 한국에서 배우고 가져왔던 틀 안에서 이분들의 믿음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노력하지만, 마음으로 다가가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미사 중에 개들이 돌아다니고, 아무런 스스럼없이 가슴을 드러내, 우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하나의 분심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틀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모습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듯 하느님께서도 다양한 민족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계심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외적인 모습은 다를지라도,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저도 이제는 마음 편하게 신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충만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구별하시어 그들의 길을 다양하게 만들어 놓으셨다”(집회 33,11)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 다양한 길,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같은 믿음과 신앙만 갖고 있다면 조금 다르게 보이더라도 이해하며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문득 깨달은 사실은, 제가 이 문화에 적응하고 삶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처럼, 분명 이분들도 외국 신부의 어눌한 말과 본인들과는 다른 생각과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서로가 다른 모습을 가졌음에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기에, 어쩌면 저와 저희 본당 신자들은 지금 이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주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로 다르다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음에도 하느님 안에서 다 같은 한 자녀임을 꼭 기억하며, 나와 다른 이들을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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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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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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