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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칼럼] (42) 고대 과학으로 현대인의 정신과 마음 설득할 수 없다 / 윌리엄 그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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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1644년에 쓴 책 「아레오파기티카」에서 밀턴은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그 학자들 가운데 앉아 있었으며, 그들은 영국에는 철학적 자유가 있다고 여겨서 그런 곳에서 태어난 나를 복 받았다고 보았다. 반면, 그들은 노예 상태에 빠져 있는 자신들의 학문 상태를 한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바로 이것이 이탈리아의 지혜의 영광을 시들게 했다. 최근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는 아첨과 겉만 그럴 듯한 글 말고는 아무 것도 저술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그 유명한 갈릴레오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재판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천문학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을 받고 갇혀 지내며 늙어가고 있었다.”

갈릴레오가 구금된 데에는 천문학과 무관한 이유들도 많았다. 몇몇 성경 구절들에 어긋나는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면 가톨릭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고수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공격거리를 개신교 문자주의자들에게 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그중에 적잖은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갈릴레오 사건의 근본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천문학적 이해를 저버린 새로운 과학을 지지했다는 데 있었다. 갈릴레오는 태양과 다른 행성들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리라고 보았던 코페르니쿠스 신부의 태양 중심 천문학을 지지했다.

관찰과 계산이 강조되는 새로운 과학 혁명보다는 전통적 과학을 택한 것이 가톨릭교회와 과학이 단절되는 시작이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나마 과학적 진보를 포용하려는 교회 지도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단절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과학자들과 교회 사람들(대다수 남성인)은 대개 서로를 경계하며, 서로에게 의혹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1992년에 와서야 로마는 마침내, 1633년의 갈릴레오 재판을 다시 검토했던 위원회 책임자인 폴 푸파르 추기경의 입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이론을 채택하는 데에서 갈릴레오가 옳았음을 안다”고 인정했다. 추기경이 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신자들에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어도 된다고 공식 선언하기까지 무려 359년이 걸렸다.

여전히 우리는, 학창시절 과학시간 내내 졸았었나 싶은 이들이 이끄는 교회 안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가 성찬례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면서 ‘실체변화’라는 표현 또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최근의 어느 연구에 대한 일부 주교들의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는 기본 실재인 ‘실체’가 있고, 이것은 여러 구체적 범주들인 ‘특성’의 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강아지 똘똘이가 지닌 개다움이 ‘실체’라면, 이 강아지가 지닌 똘똘이다움은 ‘특성’이다.

‘실체변화’란 빵과 포도주의 색깔, 모양, 맛, 냄새 같은 ‘특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2500년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톨릭적으로 정착시킨 깔끔하면서도 지적으로도 만족스러운 설명이니,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더 이상 그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분명 언짢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17세기의 과학 혁명 이후에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실체’와 ‘특성’에 기대어 그 믿음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이해도 안 되고 아무런 설명도 되지 못한다.

설문 조사들이 보여주듯, 그리스도께서 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믿음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강력하게 존재한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신자들을 비롯한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체변화는 결코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고대의 무지로 현대의 과학을 이기려 드는 것은 단지 성사 신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성(性) 정체성에 관해 교회 안에서 일고 있는 논란들은 현대 생물학 및 사회학의 연구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피임 문제도 마찬가지다. 생식 생물학의 케케묵은 개념들이 윤리 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대다수 현대인들은 이를 무시한다. 고대의 과학으로 현대인들의 정신과 마음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이다.

형이상학 연구는 신학교 교육에 필수 요건이다. 그러나 현실 이해는 더 이상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의 영역이 아니다. 신학자 양성에서 과학과 그 실증적 수학적 탐구가 철학과 융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화를 선포하고자 하는 신학이 현실 세계에서는 점점 탈육화하게 될 것이다.


윌리엄 그림 신부(메리놀 외방전교회)
※윌리엄 그림 신부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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