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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칼럼] (47) 성 요한 23세를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존경 / 존 알렌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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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직은 복잡다단하다. 그러니 교황직을 하나의 개념, 정신이나 어록으로 축약하는 것은 늘 잘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의 교황직 안에는 서로 다르고 때로는 상충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온갖 추진력들과 의제들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교황직이라는 실타래에 복잡하게 엉킨 여러 가닥을 풀기 위해 애쓰다 보면 유용한 분석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분석이 들어맞는 경향이 하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은 성 요한 23세 교황을 향한 일종의 오마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가장 최근에 그런 경향이 엿보인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레토의 성모 축일(12월 10일)을 보편 전례력에 추가하고 미사와 성무일도 예식도 포함시킨 것이다.

물론 이는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깊은 성모 신심과 성가정 신심에 힘입은 것이다. 이 결정을 반포한 교령도 이 축일이 “모든 이들, 특히 가정들과 젊은이들과 수도자들이, 복음의 완벽한 제자이시며 교회의 머리를 잉태하시면서 우리도 당신 자녀로 품어 안으신 동정 성모님의 덕행을 본받게 도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로레토 성모 순례지는 성 요한 23세 교황과 연관이 깊고, 그에게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1962년 10월,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가 개막되기 직전에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기 위해 찾은 곳이 바로 로레토였다.

그 방문은 역사적 의미가 컸다. 187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들을 상실하면서 교황이 스스로를 ‘바티칸의 수인(囚人)’이라고 선언한 이후, 교황이 로마를 벗어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교황이 자처한 그 감금은 교황직과 현대 이탈리아 공화국과의 분리뿐 아니라 정교분리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졌다.

교황이 바티칸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즘 정부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비오 11세 교황 시절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교황들은 간간이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당을 방문하거나 카스텔 간돌포에서 여름을 지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바티칸을 떠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상이 교황을 찾아올지언정 교황이 세상을 찾아가지는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1962년에 요한 23세가 로레토행 열차를 탄 것은, 한 세기의 전례를 깨고 교황직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교황이 신앙의 깃발을 꽂기 위해 언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짐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받아들여 밖으로 향하는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뚜렷한 의제를 규정하게 될 터였다.

로레토와 요한 23세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1971년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요한 23세의 비서였던 로리스 카포빌라 몬시뇰을 로레토 순례지 담당 고위 성직자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후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다섯 번,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이 두 번 방문하는 등 다른 교황들도 로레토를 찾았지만, 여전히 요한 23세의 첫 방문이 상징적 방문으로 기억된다.

청년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훗날 프란치스코 교황)가 1958년 3월 예수회에 입회했을 때는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 요한 23세 교황으로 선출되기 7개월 전이었다. ‘착한 교황’ 요한 23세의 모범은 베르골료의 초기 사제직 양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요한 23세의 로레토 방문을 보았을 것이고, 그 방문에 담긴 예언적 의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교황직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부흥과 구체적 적용으로 여겨 왔다. 2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신학자들에게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언제나 그 사건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교황직에 관해서도 그래왔음은 분명하다.

전례서 번역 권한을 지역 주교회의들에 넘기고,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기능을 되살리며, ‘건강한 분권화’를 주장하고, 성직주의를 한결같이 비판하면서 평신도의 역할을 지지하는 등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느 모로 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공의회를 소집하고 기초를 놓은 성 요한 23세 교황에게 언제나 영감을 받아 왔고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에 요한 23세 교황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나란히 시성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이 교황청이 인정한 두 번의 기적에 근거한 반면, 요한 23세의 경우는 전통적인 기적 요건을 제쳐두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연 공로가 근거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 전례력에 로레토가 들어가게 된 일차적 이유는 성모님과 성가정을 기리기 위해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단순히 요한 2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면 훨씬 더 직접적인 방법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결정의 이차적 의미도 놓치지는 말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의 상속인으로 여기며, 그가 남긴 유산이 여전히 오늘도 교회의 열차가 달리도록 밀어붙이고 있다고 믿는다.


존 알렌 주니어(크럭스 편집장)
※존 알렌 주니어는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럭스(Crux) 편집장이다. 존 알렌 주니어 편집장은 교황청과 교회에 관한 베테랑 기자로 그동안 9권의 책을 냈다. 그는 NCR의 바티칸 특파원으로 16년 동안 활동했으며 보스턴글로브와 뉴욕 타임스, CNN, NPR, 더 태블릿 등에 기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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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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