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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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령이 머무시는 ‘영혼의 미술관’임을 입증해야

오늘날 성령이 있는 곳은 교회인가 미술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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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는 미술관으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엇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인종 차별과 각종 혐오가 넘쳐나는 현시대의 표징들 안에서 성령의 존재를 교회 안팎에서 식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이를 검증해야 한다.



돈이 우상이 된 물신주의 현대 세계에서 성령은 어디에 존재하고 계실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미술관이 현대인들의 새로운 교회”라고 말한다. 미술관이 일찍이 종교가 담당했던 기능과 필요를 현대인들에게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 보통의 이 주장대로라면 과거에는 명백했을지 모르나 세속화된 현대 세계에서 성령은 어디에 존재할까 하는 물음을 마주하게 된다.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있으며, 하느님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다”는 초대 교부 이레네오 성인의 가르침대로 교회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식별할 수 있다고 배워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답하기 위해 인간이 지닌 미학적-영적인 면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성령께서 어디에 존재하시는지 그 좌표를 살펴보았다.





미학적 인간

미술관이 교회를 대체할 만한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드 보통은 “미술관은 교회의 예배에 참여한 것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 내적 치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미술관은 ‘십자가 없는 교회’라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한 해 평균 900만 명이 방문하는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 모두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세계 예술시장은 현재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예술품 투자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예술품은 인플레이션이 와도 가격 회복력이 크기에, 전염병이나 전쟁 이후 투자자들이 예술품 시장에 몰리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반복돼 왔다.

저명한 인류학자 엘렌 디사나야케는 예술을 즐기고 창작하는 인간의 본성을 바탕으로 인류를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을 ‘미학적(예술적) 인간’(Homo Aestheticus)이라고 정의했다. 디사나야케는 “예술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한 인간 본성의 한 요소”라며 “말을 배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고 선천적인 능력인 것처럼 예술 또한 자연적, 보편적 성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은 미적 본성과 예술성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현대 예술, 정체성을 상실하다

예술과 종교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일은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이자 과제이다. 아이러니하게 현대인들의 내적 욕구를 채워줄 ‘새로운 교회’라 불리는 미술관에 대한 대중의 압도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현대 예술은 위기를 맞고 있다. 예술에 절대적인 자유가 부여되어 어떤 작품이 예술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미술 비평가들과 미학자들은 무제한적 자유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가 현대 예술의 정체성에 혼란을 줘 위기에 빠뜨렸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혼란의 사태를 정면 돌파 중인 미술관은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를 총체적으로 대체할 완전한 쉼터로서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미술관,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재확인하는 장소

현대인들은 사회 안에서의 고독감, 삶의 방향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불안감 등으로 인해 삶의 여유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미술관이 교회를 대신할 궁극적 영혼의 장소는 아닐지라도, 미학적 인간에게 있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성지’(聖地)의 역할은 가능하다.

“성령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라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처럼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성령은 교회 안에 존재하신다. 동시에 이 관점은 미술관 역시 인간의 자기 정체성, 즉 성령에 개방된 영적 존재임을 확인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유는 인간은 미술관에서 자기의식을 지닌 존재임을 재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바티스타 몬딘은 「자유인」에서 “인간은 그 존재의 심층부에서 영이며, 영으로 인해 인간은 자의식적”이라고 말한다. 프랑스 신학자 장 다니엘루는 「이교의 신화들과 그리스도교의 신비」에서 인간의 영적 측면에 대한 이러한 입장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심화시킨다. 그는 “인간은 생물학ㆍ지성적 단계를 지닌 복잡한 존재이며, 하느님과 만나는 최종 단계에는 하느님의 생명과 삼위일체의 심연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오히려 인간의 한 부분이 성삼위의 위대한 공간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감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는 통합적 인본주의”라고 결론 내린다.

성령과 예술 모두는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발견하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를 무제한적 자유가 아닌 선과 진리를 택할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 그렇다고 해서 미학적 인간이자 영적 인간임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인 미술관이 성령의 자기계시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유는 영적 측면을 받아들이는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통합적 이해는 미학적 인간을 회복시키며 생물학적 측면에 내재하는 더 깊은 인간 내면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보편 교회가 영혼의 미술관 돼야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영적 갈증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미술관을 찾는 일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미술관으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엇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세계의 성령의 좌표를 파악하는 일은 이레네오 성인의 설교를 단순히 반복하는 데 있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은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공간을 재창조함으로써, 그 공간을 과거의 창조물을 모아놓은 죽어 있는 도서관 이상의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라는 영혼의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사제들과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이 미술관에서 드러나는 미학적 인간의 의미와 회복이 교회가 말하는 영적 인간의 이해에 달려 있음을 실천적으로 입증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머무르시는 곳이 미술관이라는 현대인들의 인식을 벗어나게 하지 못하게 될뿐더러 결국에 보편 교회는 ‘새로운 교회’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현대 교회, 성령의 존재 식별할 수 있는 환경 구축해야

성령의 좌표를 파악하는 일은 세속화가 심화하는 상황 속 현대 교회의 과제이다. 신학자 박준양 신부는 「성령론」에서 “우리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에 관한 식별을 통해서만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에 주어진 가장 시급한 임무에 하느님의 영이 충만하다. 그렇기에 인종차별과 각종 혐오가 넘쳐나는 현시대의 표징들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성령의 존재를 교회 안팎에서 식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이를 검증해야 한다.

만물과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시는 성령 안에서 인류가 내적 일치를 이룰 때 “성령은 교회를 바탕으로 하여 세상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신앙고백이 비로소 권위와 정당성을 지닌다. 만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이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목소리라면, 이것은 어쩌면 모든 이를 ‘영적 차원’으로 초대하시는 성령의 부르심일지도 모른다. 정석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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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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