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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기도를] 안중근 의사 연구 권위자 최서면(아우구스티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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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사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아우구스티노) 국제한국연구원장이 5월 26일 선종했다. 향년 92세. 김황식·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공동위원장을 맡아 최서면박사장례위원회가 꾸려졌으며, 장례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 사회장으로 진행됐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하늘묘원 선영.

본명은 최중하로 고(故) 최규하 대통령의 사촌 동생으로도 알려진 고인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45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대한학생연맹 위원장을 맡아 김구 선생을 따라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47년에는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돼 무기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으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도움으로 미군정에 재심을 청구한 끝에 1949년 10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때부터 이시영 선생이 새로 지어준 이름 ‘최서면’으로 활동했다.

옥중에서 ‘아우구스티노’로 세례를 받은 최서면 원장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란 간 부산에서 ‘성 방지거의 집’을 열어 고아 100여 명을 돌봤다. 이 일을 계기로 고 노기남 대주교와의 인연이 닿았고 서울대교구 내 행정을 맡기도 했다. 재속프란치스코 회원이었던 최 원장은 고 장면(요한) 전 총리를 돕다 체포 위기에 직면하자 1957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초기엔 주로 천주교 관련 기록을 찾아 연구했고 1960년 일본 아세아대학 교수가 됐다. 이후 30여 년 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독도와 안중근 의사 등 한일 관계 역사 자료 수집과 연구에 힘썼다.

한국과 일본 외교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실세로 활약하는가 하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일본 고지도 등을 공개하며 반박하기도 했다. 또 이봉창 의사 재판기록을 비롯해 북관대첩비와 안중근 의사 및 추사 김정희의 유묵 등을 찾아내 한국으로 반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최초로 입수한 것을 계기로 ‘도쿄한국연구원’을 열었고 1988년 귀국해 국제한국연구원을 운영했다. 2010년 독도 영유권 수호 유공자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최 원장은 교회에 대한 애정도 특별했다. 2004년 「한국관계사목록」을 편저한 기념으로 본지와 인터뷰 한 최 원장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교황이 한국 국민들에게 격려문을 보냈다는 내용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가 ‘독립운동 천주교 대표’로 계약된 사실,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간도 용정천주교회에서 적극 지원했다는 내용 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며 한국교회사 연구에 이바지한 사실을 밝혔다.

저서로는 「독도가 우리 땅인 이유」, 「새로 쓴 안중근 의사」 등이 있다. 말년에는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 한국몽골친선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낙연 위원장은 추모식 조사에서 고 최 원장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며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 안중근 의사의 옥중자서전, 독도가 우리 영토로 그려진 옛 지도도 선생의 노력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됐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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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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