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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침묵] 영혼의 휴가

김소일 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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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가정은 대략 6명의 노예를 거느렸다고 한다. 오늘날 현대인이 누리는 과학문명의 혜택은 그보다 훨씬 크다. 세탁기와 전기밥솥만 해도 노예 몇 사람 몫을 해낸다. 자동차, 전화기, 컴퓨터, 엘리베이터 등 무수한 발명품이 다 그렇다. 어느 학자의 계산으로는 미국의 평균적인 가정은 무려 400명의 무생물 노예를 거느린 셈이다. 에너지 전문가도 비슷한 추정을 했다. 미국인 한 사람은 평균 174명의 가상 노예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 고대 로마의 귀족보다 수십 배는 한가해야 할 텐데 현실은 정반대다. 어찌 된 일인지 더욱더 시간에 쫓기며 산다.

시간이 없다. 하루를 마감하며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아침에 말씀을 읽고 고요히 하루를 봉헌하지 못한다. 허겁지겁 시작된 하루는 늘 불규칙한 귀가로 끝난다. 이웃과 친교를 나눌 시간도 부족하다. 호숫가를 거닐며 시 한 편 떠올릴 여유, 가을 숲 속에서 자연과 우주를 사색할 호사도 누릴 수 없다.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루 24시간, 그 많은 시간은 다 어디에 있는가? 기계가 대신해 준 그 여분의 시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우리는 쉬어도 쉬지 못한다. 휴가는 휴가가 아니다. 가족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길은 막히고 차는 많다. 휴가지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산에도 바다에도 계곡에도 이미 점령군으로 넘쳐난다. 저 무지막지한 소비와 거친 욕망의 배설과 한풀이하듯 쏟아내는 감정의 발산을 보라. 저들 대부분이 마치 전투에 나선 병사처럼 맹렬하다.

휴가의 일정은 빼곡하다. 오늘은 해변으로, 내일은 무슨 ‘파크’로, 올해는 동남아로, 내년엔 유럽으로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허투루 보내랴. 단 하루의 휴식도 아깝다. 무언가를 보아야 하고, 체험하고 즐겨야 한다. 여행하고 관광해야 한다. 그렇게 휴가를 마치고 돌아올 때쯤 종종 파김치처럼 늘어진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이제 휴가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한 또 한 번의 휴가가 필요해진다.

휴가란 쉬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괜찮은가. 혹시 출세와 성공을 위해 쫓기듯이 살지는 않았는가. 어느 날 문득 우울하고 슬프지 않던가. 이따금 짜증이 차오르고 까닭 모를 분노가 치솟지 않던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돌연 버럭 소리 지른 적은 없는가. 아픈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휴가는 휴식이어야 한다.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또 다른 강박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리라. 책과 음악 속에서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 낮잠도 좀 자리라. TV와 스마트폰을 끊고 온전히 나만의 세계에 머물리라.

휴가는 무엇보다 영혼의 충전이어야 한다. 휴대폰의 배터리도 충전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우리는 한적한 곳에서 그분을 만나고, 그 은은한 에너지에 감전되어야 한다. 그분은 고독과 고요 속에서 충만한 기쁨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숲 속 작은 길, 새벽 안개, 풀잎에 맺힌 이슬과 스치는 바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외딴 계곡들은 고요하고 아늑하며 시원하고 그늘져 신선한 물이 흘러넘칩니다. 그곳은 다채로운 식물과 아름다운 새소리로 인간의 감각에 깊은 휴식과 아늑함을 주고, 우리가 고독과 고요 안에서 기운을 북돋우고 휴식하도록 해줍니다. 이 계곡들은 제가 사랑하는 그분과 같습니다.”(십자가의 요한 「영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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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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