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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칼럼] 아우슈비츠수용소 노인이 부른 그 노래

김원철 바오로(보도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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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종종 나오는 배경이다.

어둠에 휩싸인 아우슈비츠수용소. 초겨울 달빛이 유난히 차갑고 하얗다. 창살 틈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막사 내부를 비추자 줄지어 누워 있는 수감자들이 더 유령 같아 보인다. 모두 창백하고 여윈 산송장이다. 막사 안은 무거운 침묵뿐이다.

침묵을 깬 건 구석에서 들려온 노랫소리다. ‘콜 니드라이(Kol Nidrei)’라는 고대 히브리 기도에 가락은 얹은 노래다. 창문 너머 밤하늘을 응시하며 노래하는 한 노인의 얼굴에 하얀 달빛이 내려앉았다. 수감자들은 하나둘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에 젖은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노래가 끝나자 그들의 얼굴에 환희가 넘쳐났다. 노인은 노래기도에 심취한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찰렛(Szalet)은 그날 밤 죽음의 수용소에 감돌기 시작한 희망을 “한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환희”였다고 증언했다.(데렌스 데 프레 지음 「생존자」 170쪽)

전교 주일을 앞두고 찰렛의 증언이 떠오른 건 한국의 우울한 종교 현실 탓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너무나 거침없이 많은 말을 쏟아낸다. 난이도 최상의 수수께끼 같은 물음에도 신의 이름으로 척척 답을 내놓는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혹은 박제화(剝製化)된 답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확신에 넘친다. 한동안 TV 힐링 프로그램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더니 요즘은 정치 이념의 전쟁터가 돼버린 광장에서도 들려온다. 그런 목소리를 싸잡아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 더욱이 광장에서 들려오는 극소수 종교인의 극단적 발언에 이러쿵저러쿵 논평할 능력이 필자에게는 없다.

이런 와중에 종교인 추문이라도 매스컴에 오르내리면 이 땅의 모든 종교는 ‘도매금’으로 넘어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자캐오들(루카 19,1-10 참조)은 나무에서 내려와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 의심하는 회의론자, 자캐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호기심을 보이던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별거 없네” 하며 발길을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두운 밤에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까. 무슨 노래를 불러야 돌무화과나무 위의 자캐오들이 귀를 기울일까. 또 고통의 수렁에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무슨 노래로 구원의 희망을 전해 줄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자캐오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듣고 싶어한다. 그런 구원의 노래가 들려오면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처럼 자세를 경건하게 가다듬고 앉아 경청할 것이다. 또한, 자캐오들은 화합의 노래를 목말라한다. 갈등과 편 가르기에 지칠 대로 지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다. 그 불꽃이 갈등의 잿더미 속에 묻혀 있으면 안 된다. 그 속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영적 게으름이다. 잿더미를 헤치고 나와 화합과 치유를 위한 대동 마당에 불을 붙여야 한다. 사람들은 갈등과 증오로 아파하는데, 왜 화해ㆍ용서ㆍ사랑ㆍ형제애로 지은 복음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치유와 화합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내고 나서주길 고대한다. 그것이 지금 그리스도인이 불러야 하는 노래이자, 한국 사회가 기다리는 ‘기쁜 소식’이다. 문득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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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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