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말과 침묵] 이제와 저희 죽을 때

김소일 세바스티아노(보도위원)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그날은 주일이었다. 마을에서 읍내까지는 버스가 다닌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 버스에 올랐다. 낯익은 듯 운전기사와 인사를 나눴다. 맨 뒷자리에 앉더니 눈을 감았다. 늘 하던 대로 나직하게 웅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읍내 정류장에 버스가 멈췄다. 노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어르신, 다 왔습니다.” 미동도 없었다. 누군가 살며시 어깨를 흔들었다. “어르신, 내리세요. 교회 앞이에요.” 노인의 상체가 비스듬히 쓰러졌다. 가슴에 품었던 성경과 찬송가 책이 스르르 풀렸다.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친구는 목사다. 신도가 100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교회에서 목회한다. 아버지는 주일마다 아들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날도 그렇게 교회로 가는 길에 부르심을 받았다. 고요한 소천이었다.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고 했다.

누구나 선생복종을 원한다. 모두가 편안하고 복된 죽음을 소망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죽음은 흔치 않다. 많은 이들이 질병의 고통을 겪는다. 정신의 혼미 속에서 헤매기도 한다. 병원이나 요양원이 우리의 말년을 기다린다. 애처롭고 두려운 일이다.

삶과 죽음은 반대어가 아니다. 삶의 완결이 죽음이며, 죽음의 과정이 삶이다.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에 이르러 삶을 반추한다. 먼저 선한 삶이 있고서야 복된 죽음도 바랄 수 있다.

어느덧 위령 성월이다. 이맘때가 1년 중 가장 쓸쓸하다. 10월은 단풍으로 황홀했다. 12월은 대림의 기쁨으로 맞는다. 그 사이 11월은 퇴색한 낙엽의 계절이다. 곱게 물든 단풍은 곧 칙칙한 갈색으로 바뀌어 거리에 나뒹굴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휑하니 가슴을 쓸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하나둘 떠나는 계절이다.

11월은 죽음을 묵상하기에 좋은 달이다. 산행 중에 묘지를 만나면 그 누런 잔디 위에 잠시 누워본다. 묘비조차 없는 무덤 곁에서 바람이 전해주는 탄식을 듣는다. “나 오늘 여기에 누워 있노니, 젊은 벗이여,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온다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기억하게나. 죽음은 언제나 그대 곁에 있고 그대는 그때를 모른다네.” “인생의 아쉬움이 뭐냐고 물었나. 살아있을 때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것이라네. 부디 헛된 탐욕에 매달리지 말고, 나누고 섬기고 사랑하게나.”

11월은 기도가 깊어지는 달이다. 천국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연옥으로 기도가 이어진다. 천국 영혼이 바치는 기도가 한 줄기 바람으로 우리를 휘감는다. 연옥 영혼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늦은 밤 촛불로 피어오른다. 그곳은 죄 많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할 곳이다. 그러니, 영혼이여. 지금 바치는 이 기도를 기억해 주소서. 머지않아 이 죄인도 애덕과 탄원의 기도를 간절히 그리워하리니, 부디 그때 잊지 말아 주소서. 세상의 어진 벗들이여, 언젠가 이 가련한 영혼을 위해 작은 화살기도라도 바쳐 줄 수 있겠나.

우리는 통공의 신비를 믿는다. 그리하여 위령 성월에 바치는 연도 가락에는 유난히 간절함이 스민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어주소서. 제가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직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의지와 노력만으론 선생(善生)도 복종(福終)도 어려우리니, 겸허히 기도할 뿐이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9-10-30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3

이사 62장 5절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