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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이땅의 가난한 동방박사들

김소일 세바스티아노(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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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편을 위해 머리를 잘랐다. “갈색의 작은 폭포처럼”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팔아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했다. 남편의 손목시계에 잘 어울리는 시곗줄이었다. 남편도 아내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손목시계를 팔아야 했다. 그 돈으로 아내의 머릿결을 다듬어줄 머리빗을 샀다. 성탄 전야에 서로의 선물을 확인한 부부는 안타까운 비명을 지른다. 미국 작가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은 ‘동방박사의 선물’이다. 소설 속에 동방박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했던 부부를 동방박사에 빗대고 있다. 그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동방에서 찾아온 현인들이다. 아기 예수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 가난한 부부의 어긋난 선물을 구세주에게 바쳐진 귀중한 예물에 비길 수 있을까. 작가는 제목을 통해 그런 비유를 암시한다.

황금은 예나 지금이나 부귀의 상징이다. 유향은 신성한 의식에 사용된 고급 향료다. 몰약은 치료와 미용에 쓰던 값비싼 의약품이다. 동방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귀중품을 예물로 바쳤다. 그에 비하면 시곗줄과 머리빗은 작고 소박하다. 이 가난한 선물을 동방박사의 예물만큼이나 고귀하게 만든 것은 부부의 사랑이다.

따듯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선물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에게 기쁨과 감동을 안겨줄 수 있다. 실은 가슴 설레는 선물을 받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선물은 묘하게도 받는 사람만큼 주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선물을 준비할 때부터 마음은 설레고 들뜬다. 무엇을 줄까 고르는 즐거움, 받는 이의 표정을 상상하는 기쁨이 있다. 선물을 주면서 이미 그 이상의 보상을 받는 셈이다.

때로는 한 사람의 일생을 걸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한다. 결혼을 앞둔 젊은 연인은 존재 그 자체로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한 번의 눈짓으로, 그대 목걸이 한 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아가 4,9) “나의 연인이여, 서두르셔요. 노루처럼, 젊은 사슴처럼 되어 발삼 산 위로 서둘러 오셔요.”(8,14)

사랑하는 부부에게는 또 하나의 선물이 다가온다. 새 생명의 탄생이다. 아기는 인간이 주고받는 선물과는 차원이 다른 축복이다. 한 번의 몸짓, 한 번의 웃음으로도 벅찬 행복을 안겨준다. 아이는 우주보다 소중한 선물로 오면서 천국의 순수와 평화를 세상으로 가져온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한때는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존재 자체로 부모와 가족에게 기쁨을 안겨드렸다. 젊음의 열정으로 뒤척이던 날, 너와 나는 감미로운 선물이었다.

다시 보니 삶이 온통 선물이었다. 슬프고 외로웠던 시간도, 절망과 고통으로 번민했던 순간도, 온전히 그분의 은총 속에 있었다. 이제 무엇을 더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으련다. 황혼과 더불어 다가올 고독과 노쇠마저도 그분의 선물임을 믿는다.

선물로 받은 삶을 다시 선물로 내놓고 싶다. 남은 시간 누군가에게 선물 같은 삶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선물이 될 수 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되리라.

아기 예수는 어디에나 있다. 누구나 동방박사가 될 수 있다. 이 추운 겨울 저녁에 군고구마 봉지를 품어 안고 귀가하는 이 땅의 선한 가장들이여. 밤하늘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을 찾아가는 동방의 현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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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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