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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파늘루 신부를 위한 변론

김원철 바오로(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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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책은 원래 다음 달 봄맞이 대청소하는 날, 철 지난 책들과 함께 묶여 고물상으로 실려 갈 운명이었다. 이 책이 용케 수명을 연장한 것은 큰 재난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시 관찰하고 싶어 한 ‘주인님’의 호기심 덕분이다.

소설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은 아무래도 의사 리유와 파늘루 신부다. 두 사람은 전염병 페스트가 덮쳐 도시(알제리 오랑시) 전체가 봉쇄된 절망적 상황에 정반대로 대응한다. 리유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 즉 죄 없는 어린애를 포함해 무고한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재앙에 완강하게 저항한다. 침묵하고 있는 하늘만 쳐다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싸워나간다. 실존주의자 카뮈가 그대로 투영된 인물이다.

반대로 파늘루 신부는 초월적 태도를 보인다. 페스트는 악과 타협한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것이다. 고통은 죄에 물든 영혼을 정화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는 전통적 해석도 덧붙인다.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첫 기도회 강론)

파늘루 신부는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경고” 운운한 어느 종교인을 닮은 면이 있다. 그렇다고 파늘루 신부에게 눈총을 줄 것까지는 없다. 세월호 비극은 현실이었고, 「페스트」는 꾸며낸 이야기다.

소설은 예심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파늘루 신부는 이 순간 초월적 태도를 접는다. 페스트는 신의 징벌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구체적 일부임을 인식한 것이다. 이후 보건대에 참여해 누구보다 맹렬하게 페스트와 싸운다.

그가 두 번째 기도회 강론부터 오랑 시민들을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칭하는 점에 눈길이 간다. 그는 페스트의 비극적 얼굴을 직면한 뒤 자신과 시민들을 떼어 생각하지 않았다. 페스트가 들끓는 병원을 지키며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완전한 연대다. 그도 결국 페스트로 추정되는 병에 걸리지만, 치료를 거부한 채 홀로 숨을 거둔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의지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사족인 줄 알면서도 등장인물을 한 명 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이 고장 사람도 아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제 살길을 찾는 신문기자 랑베르다. 그는 오랑 시민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도시를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 그의 행동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속에서 마스크 사재기에 혈안이 된 일부 업자들의 탐욕과 겹쳐진다. 우한 교민 격리장소가 천안에서 진천ㆍ아산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지역민들 분노를 촉발한 지역구 의원들의 정치적 셈법과도 겹쳐진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는 하느님 작품이 아니다. 페스트와 바이러스, 대형 사고… 이러한 인간 조건은 1940년대 오랑시에도 있었고, 2020년 시공간에도 있다. 인간은 미래에도 이러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우리의 연대, 이것이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힘이다. 여기에 더해 신앙인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다 하면서 알 길 없는 하느님 섭리도 찾아야 한다. 불안과 두려움이 깊을수록 큰소리로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그래야 오랑시처럼 “사람들이 광장마다 모여 춤을 추고, 푸르른 황금빛 하늘이 종(鐘)들의 진동으로 채워지는” 해방의 날을 앞당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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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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