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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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김소일 세바스티아노(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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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길을 잃었다. 신앙마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교회 안에서 살았다. 큰 성당 옆 축복받은 일터에서 오래 일했다. 어느 날 보니 안으로 울고 있었다. 현실에 상처받고 미래가 두려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친구도 이웃도 동료도 멀리했다.

햇살 화사한 어느 날, 상처 입은 고슴도치처럼 동굴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둡고 축축한 그곳에서 외려 아늑함을 느꼈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상처가 아문 뒤에도 쉬이 나설 수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세상의 눈부심을 견딜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팠다. 거듭 검진을 받아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내게 의사는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진단 앞에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다. 매일 복음을 읽고 성무일도를 가까이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의 주춧돌이 그리 쉽게 무너질 리 없다! 대학병원 의사는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그 약을 서랍에 넣어 두고 오래 외면했다. 어느 날 등산길에 위태로운 유혹을 만났다.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1년도 더 지난 그 알약을 눈물로 삼켰다.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알아챌까 두려웠다. 동정과 위로 따위를 적대하고 거부했다. 성당에도, 모임에도 발을 끊었다. 주일이면 홀로 떠났다. 눈 부신 햇살 속에 서면 슬픔이 찬란히 녹아내렸다. 발 닿는 대로 시골 성당이나 수도원을 찾아가 미사를 드렸다. 간절히 구원을 바랐지만, 어디에도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책을 읽었다. 우울증을 다룬 책이 그리 많은 줄 몰랐다. 알고 보니 우울은 너무나 흔한 질병이었다. 상처와 고통은 가슴마다 넘쳤고 불안과 절망은 시대를 휘감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우울의 어머니, 우울의 자식들이 아닌 척하며 지나갔다. 공황장애, 강박증, 편집증, 조현병, 조울증, 자폐증, 사회공포증, 불면증이 죄다 불안과 우울의 그림자였다. 젊은이는 거리에서 하늘을 우러르고 나이 든 이는 돌아서서 눈물을 삼켰다.

우울은 늪처럼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외롭고 불행하다. 불안하고 수치스럽다. 스스로 내동댕이치고 싶다. 귀찮고 싫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런 감정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가까운 사람을 감염시킨다.

우울은 어디에서 오는가. 현실의 압박과 좌절인가. 어린 시절의 기억인가. 억눌린 욕망인가. 자아를 지키려는 몸부림인가. 연구도 많고 처방도 넘친다. 체험과 고백도 드물지 않다. 그래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돌이켜보니 극복이 아니었다. 그냥 견뎌낸 시간이었다. 시간의 강물이 씻어낼 때까지.

치유의 첫걸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정하고 긍정해야 한다. 몸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아플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 질환이 내게 왔음을 수긍해야 한다. 뜻밖에 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도움된다.

그다음엔 원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슬픔과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마도 내면의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어쩌면 기억에도 없는 경험이나 충격과 맞닥뜨릴 수 있다. 어둠 속에 똬리 튼 거뭇한 실체를 확인하고 목놓아 울지도 모른다.

우울증은 병이 아니라 약일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나를 파괴하지 않도록 눈물로 씻어내 준다. 그 정화를 겪어낸 사람은 달라진다. 세상의 거죽을 보지 않는다. 이웃의 얼굴에서 슬픔과 아픔을 읽어낸다. 측은지심으로 용서와 사랑을 얻는다. 고통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주문처럼 왼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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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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